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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Oct

사랑의 날개는.. 사랑의 날개는 너에게 6

작성자: 관리자 조회 수: 2637



1990. 11. 18. 날씨, 가을, 마지막 햇살 


요즘 들판에 나가보면 가을이 거의 끝나가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가을 걷이가 거의 세난 들판은 둥치만 남은 벼짚단만 있지. 코스모스도 다 지고 억새만 바람에 흔들리는데. 한 해의 수고가 끝나, 한때는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이젠 쓸쓸하다. 인간의 노동이 끝나고 들판에 선 나는 묻는다. 왜 우린, 이 들판에 서서 쓸쓸함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 먼 지평선으로 산자락에 의지한 마을은 하나둘씩 불이 켜지고 마을의 저녁연기는 자욱히 들판까지 흘러들어오는데.... 어쩌면 쓸쓸함이란, 모든 일이 끝나고 일의 대가도 거둬들이고 잠시 다음을 준비하는 휴식-, 꽉 찬 수고의 결실도 가야 할 곳으로 간 이 막간의 휴식-. 바로 이런 것이, 삶의 쓸쓸함은 아닐까. 어제의 일은 끝났고 내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수고의 대가를 손에 쥐긴 했지만 일을 끝낸 뒤의 뿌듯함과 내일의 설레임이 엇갈리는 시간.내일을 위한 인내로 땀도 다툼도 다 가을빛으로 저물고 내일은 지평선처럼 멀기만 하다. 그러나 이 쓸쓸함은 뿌듯함과 설레임 속의 쓸쓸함. 누군가를 그리워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충분히 쓸쓸하다. 그러나 다시 세월은 흐리겠지 그리고 다시 세월은, 쓸쓸함도, 설레임도, 뿌듯함도 함께 데리고 흐릴 거다. 


1990. 11. 21. 날씨, 흐리고 가끔 비 


우리 대장 김철진PD선생님. 그분이 하신 말, "착한 사람은 이런 사람이 착한 사람이야. 누구나 착해지지 않는 순간에 착해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정말 착한 사람이야." 노래가 나가는 사이, 잠시 헤드폰을 벗고 우린 잠시 착한 사람 이야길 했다. 갑자기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건 엽서 중에 이런 사 


연이 있었기 때문. "전, 정말 나쁜 앤가 봐요. 오늘 희정이가 저에게 제 단어장을 좀 보여달라고 했거든요. 희정인 저랑 성적이 비슷비슷하답니다. 근데 전, 단어장을 집에 두고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했죠. 그 단어장에는, 모의고사 예상문제가-제가만든-있었거든요. 전 정말 나쁜 애예요. 성적에만 정신이 팔려 친구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우린, 이 엽서를 보면서 이 엽서를 보낸 친구가 옆에 있으면 껴안아주고 싶다고 했다.세상에, 얼마나 나쁜 사람이 많은데 이 친구의 거짓말은 용서(?)해 주소서-라고 말하며,작은 사랑이야기 다섯 


1. 제 마음속의 꽃잎이질 때까지 


언젠가 전 그대에게 사랑하단-고 말했습니다. 저의 입술은 떨렸고 저의 가슴에는 아득한 파도소리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대답 없이 돌아섰습니다. 그대가 가고 난 뒤 붉은 산수유꽃이 졌습니다. 제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땐 그대를 향한 것이었으나 그대 떠나고 난 뒤, 사랑한다는 말은 붉은 산수유꽃처럼 붉게 져내렸군요. 사랑한다-는 말은 내 가슴속의 말일 뿐, 말하고 난 뒤, 이토록 붉은 꽃잎이 땅 위에 지는 것을, 그대여, 이젠 사랑한다는 말은 않겠습니다. 제 마음속에 꽃잎이 다시 붉게 필 때까지 제 말은 가슴에만 간직하겠습니다. 


2. 모든 바람이 


처음엔 제가 그대를 그리워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대가 보고 싶어 이토록 해매이고 그대의 곁에 흐르고 싶어 이토록 가슴 아픈 나날 속을 지내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대여. 세상의 모든 바람이 모든 나무, 모든 풀, 모든 꽃에게 골고루 불듯,세상의 모든 바람이 부드러울 땐 부드럽게, 광폭학 땐 또 공폭해지듯,저의 사랑은, 모든 이들에게 향해 가기 위하여, 자연의 얼굴처럼, 자연스러워지기 위하여 많은 나날들이 지나갔나 봅니다.갈 수 있다고 다 길은 아닌 것을, 사람의 이름으로 언제나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이제사 알고 그대를 보냅니다. 세상의 모든 바람이 그러하듯 그대, 어는 곳에 있든 그대가 힘들 때 아주 작은 등불 하나그대를 위하여 작은 처마 밑을 지키고 있음을 잊지 말아주세요. 


3. 숨고 싶은데 


둘이서, 이 세상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숨고 싶었다. 숨어서 나오고 싶자 않았다.그런데,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우린, 숨을 수가 없었다.그리고, 숨고 싶은데 더 빨리, 더 많이 들키고 말았다. 나의 눈빛과 너의 몸짓, 사랑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너무 환해오 오, 너무 빨리 들켜버린다. 그대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작은 섬 하나를 만들어 그곳에 우리를 두기로 했다 파도와 섬의 숲속에 물새알같이 둘이서만 숨어 있기로 했다. 


4. 늦었지 미안해 


늦었지, 미안해 너에게 오려는 마음만 너무 급해 버스를 잘못 탔어. 빈 손으로 오기가 뭐해서 꽃 몇 송이를 사는데 꽃집 아저씨가 거스름돈을 바꾸려 멀리까지 갔어. 꽃을 사고 오는데 연탄수레를 힘들게 미는 아저씨가 있어 수레를 밀어 드리다가 조금 더 늦었어. 또 급하게 오려는데 아이가 길을 잃고 울고 있어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다가 조금 더 늦었어. 오다가 급히 오다가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어 미안해, 늦었지. 하지만 왔으니까 이제 웃어봐. 


5. 조용한 시냇물 


흔히들 이것에 대해 말합니다.이것은 오래 참는 거다 이것은 성내지 않는 거다 흔히들 이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난 너의 생각만 해, 난 너를 전부라고 생각해. 흔히들 이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너의 눈빛에서 너의 뒷모습에서 너의 눈물, 너의 아픔에서. 그리고 흔히들 어것으로 가는 길을 멀고도 험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 이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본 이것은 어쩌면, 너에게로 향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로 향한 이기심인지 모릅니다. 온전한 이것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죠. 그리고 보이지는 더욱더 않구요. 이것은 내가 말하지 않을 때 억지로 보려고 하지 않을 때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조용한 시냇물 같은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선생님의 초상 


한 청년이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 낡은 학교 학급이라고 해봤자 고작 두 학급. 매일매일 계속되는 한가한 생활. 청년은 도시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도시로 나가 화려한 성곡동 거두어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작은 마을의 교사가 아니라 모두에게 주목받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어느날 청년은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습니다. 청년이 두고 온 작은 교무실, 낡은 책상 위엔 사직서가 놓여 있었고 새로운 생활에의 꿈을 꾸며 청년은 밤길을 걷고 있었던 겁니다. 걷고 또 걸었습니다. 밤이 오고 새벽이 오자 청년은 지쳤습니다. 그러나, 큰도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청년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새벽 안개 너머, 뿌옇게 도시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드디어, 청년은 큰 도시로 나온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청년은 걷고 또 걸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겁니다. 밤새도록 청년이 걸었던 길은 사실은, 자신의 천직이었던 교사가 되는 험하고 먼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삶, 그 어두운 밤길을 따라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선생님의 길은 이 밤,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1990. 11. 27. 날씨, 갰다, 흐렸다. 


이런 말 하기는 좀 뭐하지만,(우리 대장 김철진선생님이 보면 안됨) 우리 대장은 진짜 사나이다. 웬 아부냐구? 내 그럴 줄 알고 우리 대장은 안 봐야 된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나에게 누명을 씌우지 말기를 자, 우리 대장을 분석해보는 시간 우선 우리 대장은 키가 작다. 그 점에선, 나와 비슷. 키 작은 남자들이 이룩했던 수많은 업적을 기억하시길. 우리 대장의 얼굴은, 귀엽다(?). 그러나 과묵한 느낌은 들지 않지만, 가끔,곁에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힘이 있다. 귀엽다는 다른 말은, 참 따뜻한 표정을 가진 사나이다. 따뜻하지만, 따뜻한 것만 믿고 까불었다가는 언제, 넌즈시 혼이 날지 모른다. 혼이 난다? 나는 한번도 우리 대장의 화난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내가 실수했을 때, 가만히 웃어주는 대장의 따뜻함 뒤로는 형님 같은 서늘함이 함께 있다. 우리 대장은, 또, 대단한 감각의 소유자이다.(이건, 진희누나와 또 다른 한명의 스탭이 인정한 바이다) 작은 키, 선한 눈. 우리 대장의 꿈은 배추장수이다. 언젠가, 이런 거 저런 거 다 싫어지면 PD도, 밤의 디스크쇼도 다 그만두고 핸드마이크나 하나 들고 배추장수나 할거라고 한다. 우리들은, 테이프를 걸고 레코드를 옮기고, 또 할 말을 정리하면서 대장을 바라본다.저 따뜻한 사나이에게서 나오는 쓸쓸함과 서늘함. 나는 대장 같은 남자는 아니지만, 오늘 따라 대장의 침묵이 좋아 보이는 건 왜 그럴까. 대장이나 나나, 이 험하다고 말하는 세상. 이 세상을 살아내고, 살아내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상처와 기쁨과, 슬픔과 환히가 지나가야 힘을 머리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시보가 울렸다. 시작. 


1990. 11. 29. 날씨, 흐림 


누군가와 다투고 온 날. 저는 저의 마음의 결을 봅니다. 어쩌면 마음은 물결과도 같은 결이 있어서 광폭해지면 찬서리 같은 시퍼런 결이 온순해지면 따뜻한 햇살 같은 고운 결이 흘러가고 흘러오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엔 언젠지 모르게 마음의 결을 따라 생긴 강물이 흐르고 흘러 누군가와 다투고 온 저의 마음의 광폭한 결에 부딪혀 흔들리고 있습다. 이 마음의 결이 다시 유순해지려면 저는 얼마나 혼자의 시간 속을 헤매고 또 헤매어 햇살 고운 뜨락으로 가게 될까요. 


1990. 11. 30. 날씨, 맑음. 


친구들 중에는 더러 아주 어뚱한 일을 하게 되는 녀석들이 있는데 이 친구가 그랬다. 전자공학을 전공하던 녀석이 갑자기 소를 키워보겠다면서 강원도로 떠난 것이다. 그 친구는 떠나기 전,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겨울방학. 친구는, 서클동료들과 어울려 강원도 어느 산골 목장 근처로 MT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날씨가 갑자기 사나워져서 길이 끊기게 되었다. 친구는 동료들과 함께 그 목장에 며칠 머물게 되었는데 .그 목장에는 젖소를 키우는 목부 몇 사람과 개가 서너마리 있었다. 개는 원래 야생 멧돼지나 늑대로부터 목장을 지키기 위해 키우던 개였다. 그 개 중한 마리가 어느날 없어져버렸다. 날씨는, 비와 눈이 섞여 내리다가 한치 앞을 못 볼 만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목부들과 친구는 개를 찾다가 포기하고 목장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개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었다. 소우리, 소를 가두어놓는 실내 속에서 개는 한밤을 보냈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누구도, 우사안에 개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목부 중 한 명이 개를 데리고 우사로 들어갔다가 개를 매어두고 일을 다 보고 난 뒤 잊어버리고 문을 잠그고 나온 것이다.개는 발견되었지만, 좀 이상해져 있었다. 눈빛은 사남게 변했고 털은 쭈뼛 솟아 있었고 사람들을 경계하는지 꼬리는 빳빳하게 세우고 있었다. 야생의 모습, 개는 야생의 들개로 변한 것일까? 친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 "야생의 본능을 개는 찾았던 거야. 평소때는, 몰랐는데 자기와 다른 짐승 사이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개는 잊고 있었던 본능에 눈을 뜬 거지. 그걸보면서 나는, 나의 원래의 모습대로 살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군" 변한 개의 눈빛을 보며, 자신을 찾겠다고 떠난 친구. 전자공학이라는 첨단기술분야에서 소를 키우는 목부루 변한 친구. 며칠 전 나는 그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여기는 참 좋다. 좀더 오래 머물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여길, 좋기는 하지만 머무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닌, 나를 깨달은 내가 다시 정하는 삶의 목표가운데 있을 거다." 건투를 빈다, 엉뚱한 나의 친구야. 


1990. 12. 2. 날씨, 따뜻함 


나에겐 언제나 엉뚱한 일을 벌이고 일마다 실패로 끝나지만 그래도 발딱 일어나 다시 엉뚱한 일을 벌이는, 그래서 별명이 가제트 형사로 붙은 친구녀석이 있어. 엉뚱, 엉뚱. 이 엉뚱한 녀석이 벌이는 일은, 어떤 때는 발랄해 보이기도 어떤 땐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본인만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어떤 때는, 서클회원 모집공고를 붙이는데 말야 꺼꾸로 떡-붙여 놓고는, "야, 요새처럼 포스터 천지인 세상에 그냥 붙여 놓으면 개미가 웃는다 웃어. 자, 자, 보라구. 이렇게 꺼꾸로 붙여 놓으니까. 꺼꾸로 매달려서 봤으면 좋겠지. 응, 응?" 어느 해 여름방학 때인가, 녀석은 제법 심각하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 "너, 서해에 가봤냐?" "서해? 갑자기 서해는 왜?" "너, 비단박하긴머리조개라는 조개이름 들어본 적 있냐?" "뭐, 비단박하, 조개 머리가 어떻다구?" "이런 바보, 비단박하긴버리조개. 이 조개껍질에는 향내가 나는데 이걸 가루로 빻아 오일에 섞으면, 화장품 재료로 쓸 수 있단 말야. 거기다가 해저 몇만 미터 심해의 신비, 당신의 젊음을 감쪽같이, 감쪽같이 돌려드립니다. 어쩌구 하면서, 이상아 같은 애 하나 왜, 어깨 드러나는 드레스 있지 그런거 입혀갖고 테레비전에다 디립다 돌리기만 하면 그럼 그렇지. 좀 심각한가 했더니-어 어, 근데 이 녀석은 말만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진짜, 진짜로 서해로 떠나고 말았어. 성공했냐구? 그걸 말이라고 물어. 한달만에 거지꼴이 되어 나타나가지고는 친구 자취집에 가서 밥을 두 솥이나 먹고 닷새 밤낮, 잠난 자더래니까. 벌이는 일마다 엉뚱하고 또 99.999% 순도의 실패 그래도 한심하고 재미있는 청춘. 근데 하루는 말야. 그 친구가 벌이는 엉뚱한 일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된 사건이 일어났어. 어느날, 등교를 했는데 그 한심한 청춘이 물구나무를 서서 앞으로 전진, 전진-하고 있는게 아니겠어. 녀석이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는지,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하고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고 왁자지껄, 시끌벅적, 야단이었지. 근데, 녀석은 물구나무를 서가지고는 식식거리며 이러는 거야. "이 자식들아, 니들은 매일 바로 걷지? 세상에 가끔 꺼꾸로 봐야 바로 보인다구. 그냥 똑바로 보고 앞으로 가기만 한다고 세상이 니들 뜻대로 될 것같니, 가끔 꺼꾸로 봐야 더 잘보여, 이 플라스틱 통같이 똑같이 생겨먹은 놈들아!!" 더 이상한 일이 곧이어 일어났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무엇에 홀린 듯 책을 옆에다 휙 집어던져 놓고는 다같이 한사람씩, 한사람씩, 물구나무를 서서 전진하는 게 아니겠어. 나도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보기 시작했어. 나무도 건물도, 의자도, 심지어 나도 꺼꾸로 보이면서 빙글빙글 도는데-, 꺼꾸로 본 세상은, 발만, 구두만, 코 앞을 왔다갔다 하더라구. 구두가 하늘이야 하늘. 나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어. "보인다. 자유가, 자유가 보인다!!" 


1990. 12. 3. 날씨, 메슈맬로우의 부드러운 촉감같은 비가내림 


요즘 연인들 불쌍하지 않으세요? 자기의 연인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무스를 발라 철사줄처럼 뻣뻣하니. 연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던 아름다운 연인들의 추억이 무스 때문에, 무스 때문에 저 먼 옛날로잠적하고 말았습니다. 


1990.12.4. 날씨, 철갑 같은 무거운 안개가 나를 짓누르는 듯 


"아침 안개에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작은 딱정벌레로 변해 있었다." 엽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우선, 나를 깨우려 왔던 어머니, 오늘 아침, 자율학습시간이 앞당겨졌다더니, 새벽공부를 하러 갔나? 고개를 갸우뚱 하시면서 나갔고. 곧이어 동생, 어제 저녁 신해철 브로마이드 주고 간다더니, 잊어버리고 벌써 학교로 도망 갔구나, 으앙, 나쁜 언니!! 약이 올라 징징거리며 문을 쾅!! 나는, 여기 있어. 엄마, 혜영아, 나야 나, 나 여기 이상하게 변해 있어. 아무리 소리쳐봐도 그것은 벌레가 왱왱거리는 소리, 나가려고 해도 벌레인 나는 문을 열 수도 없고. 가만히 내 몸을 들여다보니, 꼼지락거리는 가느다란 다리, 딱딱한 철갑뚜껑으로 된 몸. 설상가상, 몸통 위에는 일곱 개의 까만점.으아아-, 내가 칠성무뉘, 딱정벌레가 되다니. 엽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나는 구 뒤로, 벌레가 되어 살아야 했다. 나는 딱정벌레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며 오늘도 학교엘 간다. 자율학습, 모의고사, 그리고 곧 입시, 나는 어느날, 벌레로 변해버린 대학입시생 고 3이다." 나는 조용히 엽서를 뒤로 덮어놓구 스튜디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답답하다. 언제쯤이면, 딱정벌레로 변할 것 같은 답답한 우리의 시험지옥이 끝날수 있을까. 어차피 있는 게 시험이라면 이런 제도나 사회분위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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