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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룹해체 후 홀로서기에 성공 


88년 MBC대학가요제를 앞두고 있을 무렵에는 정말 음악이라면 뭐든지 해낼 것만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무한궤도가 대학가요제 무대에 선 것은 상을 받아보겠다는 욕심보다는 공식경쟁무대에서 무한궤도의 실력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무한궤도가 록발라드풍의 노래 <그대에게>로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대에게>는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을 비트가 강한 멜로디에 실어 노래한 곡으로 결코 음악성이 뛰어난 노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이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 노래속에 '좋은 음악을 해보자'고 달려들었던 그룹멤버들의 정열이 베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도 해냈다'는 감격스러움을 만끽한 이 무대가 바로 나로 하여금 지금 이렇게 노래를 부르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한편 내가 대학가요제 결선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아버지는 결선 전날 어머니에게 "해철이가 가요제에서 입상권에 들지 못하도록 기도를 하는게 좋겠다"며 "만일 이번에 상이라도 받는다면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나에게 늘 무관심한척 하시면서 나를 예의 주시(?) 해오신 것 같았다. TV생중계된 대학가요제에서 당신의 바람(?)을저버리고 대상을 받는 내 모습을 보신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지 자못 궁금하다. 아마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무척이나 난감하셨을 것이다. 


무한궤도는 당시 '참신성이 돋보이는 선예그룹으로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칭찬을 받았는가 하면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실험음악을 시도하는 아마추어 그룹에 불과할뿐'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는데 대상을 받고나자 가요계 일각에서는 '비교적 좋은 학벌과 괜찮은 집안출신이라는 백그라운드가 대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비결(?)일지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문까지 돌았다. 


아무튼 나는 이 대상수상을 계기로 현재 소속돼 활동하고 있는 가요프로덕션인 대명기획에 몸담게 됐다. 아버지의 우려가 현실화(?)딘 셈이었다. 


대학가요제 결선심사위원으로 나왔던 조용필선배가 그때 우리를 어떻게 보셨는지 당시 조선배의 매니지먼트를 맡아보셨던 대명기획의 유재학사장님한테 지나가는 말로 '대상받은 친구들이 괜찮은 것 같다'고 하셨다는데 그게 인연이 됐던 것 같다. 


대상 수상직후 본격적인 활동을 앞두고 매니지먼트의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여러 프로덕션 대표들로부터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결같이 그룹전체를 받아들이겠다는 게 아니고 리드보컬이었던 나만을 솔로로 독립시켜 활동을 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그때마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것은 그룹친구들에 대한 배려지만 그보다는 솔로보다는 그룹활동이 음악실력을 닦는게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 그룹활동은 그 당시에도 침체상태에 있었고 많은 그룹멤버들을 관리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각 프로덕션에서는 그룹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매니지먼트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프로덕션을 잡지 못해 우왕좌앙하던 우리 무한궤도를 OK한데가 바로 대명기획이었다. 


대명에서는 솔로활동을 하길 바라지만 그룹활동을 하고 싶으면 언제까지라도 그룹을 하고 그룹활동이 어려워져 솔로로 나설 상황이 되면 그때도 같이 일하자는 조건을 제시했던 것이다.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렇게해서 우리는 마음놓고 음악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89년 초부터 무한궤도는 MBC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그룹이라는 주위의 인정(?)을 받으며 첫그룹앨범 제작에 들어가 6개월여만인 지난해 7월 마침내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때>를 타이틀로 한 그룹앨범을 선보이게 됐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무한궤도의 첫 앨범이 나왔을때 그룹멤버들은 너나할것없이 벅찬 감격에 눈시울을 붉혔었는데 이때의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첫 앨범이 발표된지 얼마 안돼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앨범을 내기전까지만해도 좋은 음반을 내겠다는 것 자체가 그룹음악활동의 구심적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일단 앨범이 나오자 할만큼 했다는 느낌때문인지 그룹전체적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스스로들 알고 있는 듯했지만 음악에 임하는 자세는 확실히 그전보다 못했다. 이 무렵 특히 나는 음악적으로 한계에 부딪치는 느낌이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한 무력감에 서로 잡히는 듯 했다. 


정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당시의 심정이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눈을 돌렸던 게 대마초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귀를 뚫리게 하고 자신의 능력 이상의 음악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대마초를 피운다'는 가요계 주변의 이야기를 미친 소리라고 치부했고 대마초를 하는 음악인들을 쓰레기취급을 했던 내가 말이다. 


음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나는 당시 '국악을 하는 사람들은 목청을 틔우기 위해 똥물까지 먹는다는데 대마초를 못할 이유가 어디있겠냐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한편 대마초를 매도할려면 적어도 대마초가 뭔지나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엉뚱한 생각으로 대마초에 손을 대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대마초를 하고난 느낌은 역시 백해무익하다는 후회 뿐이었다. 뉘우침과 회한이 엄습할 무렵인 지난해 10월 중순 나는 대마초 흡연으로 불구속 입건되기에 이르렀다. 철창에 갇힌 나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참담한 표정으로 바라보시던 부모님의 얼굴을 잊을수가 없다. 세상은 나혼자 사는게 아니구나 하는 뼈저린 자성을 하며 또한번 울음을 삼켜야 했다. 


한때의 악몽을 씻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할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의 따뜻한 격려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무렵까지도 몸담고 있던 무한궤도가 이런저런 주변여건의 변화로 고별콘서트를 갖고 잠정??(결국 해체됐지만)된게 지난해 말. 나로서는 자의반 타의반(?)의 솔로활동을 시작하며 제2의 음악인생을 맞게 되는 시점이었다. 


홀로서기의 어려움을 극복해가며 솔로 첫앨범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를 선보인 게 지난 6월 초였다. 사실 이때까지만해도 나는 이 첫음반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네 식을 고집해선는 좀 어렵다'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추구해왔던 그룹색깔의 음악을 나름대로 다듬어 내 곡에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뭔가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를 비롯해 랩송이 가미된 테크노음악 <안녕>, 록풍의 댄스뮤직 <연주속에서>등 1집 수록곡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요즘들어 록, 재즈, 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내 스타일로 혼합한 그야말로 '퓨전'음악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도 이같은 1집의 반응에 고무된바 크다. 


내년 1월께 선보일 2집에서는 록과 클래식에 바탕을 둔 음악에 재즈적인 요소를 가미할 생각이다. 20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시기가 아닌가. 설혹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음악을 끝까지 추구해나갈 것이다. 훗날 연주팀 프로젝트를 구성해 연주음반 기획자나 레코딩 프로듀서로 나설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음을 행복하게 느낀다. 


좀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지만 지면관계상 이만 줄여야하는 아쉬움이 크다. 못다한 이야기는 훗날 또 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본다. 음악을 사랑하는 누구와도 밤을 새워가며 음악과 인생을 얘기하고 싶다. 


아무튼 日刊스포츠의 이 스타스토리를 통해 나는 나를 아끼는 팬여러분과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고 팬여러분도 그렇게 느꼈으리라고 믿는다. 


끝으로 귀중한 지면을 이처럼 할애해주신 日刊스포츠와 지루한 내 이야기를 끝까지 애독해주신 日刊스포츠 독자여러분께 거듭 감사드리며 좋은 가수로 기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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