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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이야기-대중 음악 공연의 현주소는 Part II


공연장 문화의 불합리를 고발한다


이번 호에서는 공연 문화의 문제점들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기로 약속했었다. 전문 공연장은 커녕 체육관 대관의 불합리, 야외 공연의 까다로움, 소극장 공연의 한계, 그리고 매스컴의공연 문화 배척과 정부의 복잡한 공연 허가 절차 등 그 어느것 하나 이 나라 대중 음악 공연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지 않다. 어려운 공연 문화의 현실을 고발한다. (편집자 주)


지난 호에도 우리 관객 수준의 발전에 대해서 논한 바 있지만 이번 본 조비 공연에서는 정말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글세, 웃옷을 벗어 던진 채 열광하던 남성 팬들의 모습을 노친네들이 보았다면 눈쌀을 찌푸렸을지 모르나 필자의 기준으로 그것은 매우 쿨(?)한 모습일 분이다. 플로어에 있던 관객들이 모두 의자위로 일어서는 바람에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던 부분도 있으나 록 밴드의 공연을 앉아서 보라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인게 아닌가 차라리 관객이 일어서더라도 무대가 보이도록 의자간 간격을 늘리는 게 낫지(입장객 수가 줄어들겠지만...). 필자는 일본 관객의 분위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질서를 지키는 것은 놓으나 군국주의를 연상시키는 똑같은 각도, 똑같은 높이의 (그것도 팔을 완전히 뻗지 않고 귀밑까지만)동작이 싫기 때문이다.그에 비해 우리 관객은 오히려 적당히 건강한 정도의 흥분과 질서를 유지했다고 생각된다. 글세, 팔이 너무 안으로 굽는 건가? 자, 이번 호에서는 공연 문화의 문제점들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기로 약속했었다. 먼저 공연장으로 안내한다. 공연장은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을 수용하는 전문 공연장, 기존의 체육 시설들을 이용하는 소위 스타디움 공연, 공원이나 광장 등을 이용하는 야외 공연, 그리고 규모는 작지만 좀더 관객과 가까이있을 수 있는 잇점이 있고 다양한 형태의 과감한 문화적 실험을 할 수 있는 소극장 공연 등이 있다.


대중 음악 전문 공연장이 없다!


먼저 전문 공연장을 보자. 현재 대중 음악 전문 공연장은...없다! 우리 대중 음악이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것은 이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인구 비례로 볼 때 대중 음악 선호 인구가 많은 국민들에게서 거둬진 세금으로, 예술 진흥 차원이 아닌 위정자의 과시 욕에 의해 지어진 공연장들은 순수 예술을 위해서만 운영되고 있다. 대중 예술과 순수 예술의 수준 차이를 그 폐쇄성의 이유로 든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번스타인이나 코플랜드같은 순수 예술의 대가들이 비틀즈를 현대 음악의 중요한 작곡가로 대우한 것이 그 언제이던가. 이제는 현대음악의 주요 신진들은 심지어 팝, 록, 재즈의 기법을 작곡에 이용하고 있다. 세계굴지의 오케스트라들이 록 음악가들과 진지한 협연을 시작한 지는 오래된 일이다 (기존 가요 곡을 대충 오케스트라로 편곡해서 엉성하게 연주하곤 팝과 클래식의 만남이니 하고 가증스럽게 떠드는 차원하곤 다르다. 도대체 가요를 오케스트라가 연주해 주는 것만으로 감격해 하라는 X같은 발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단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대중가수와 노래를 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는 해프닝이 최근까지도 있었다. 또한 팝과 국내 대중 음악을 별개로 보는 시각도 같잖은 것이다. '팝'은 그들의 자국에선 '가요'가 아닌가. 앞서 예를 든 비틀즈는 그만한 수준이 되지만 우리 대중음악은 그런 대우를 받을 수준이 아니다라고 내게 말한 순수 예술계 인사가 있었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랬다 우리 나라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숫자가 우리 국민 체육 수준과 일치하던가? 비록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순순 음악 연주자가 (한국 '출신'일 뿐 사실 한국이 '배출'한 것은 아닌)몇 있다고 해서 우리 대중 음악을 매도할 정도로 수리 순수예술계가 수준이 높다라고 주장한다면 실상을 아는 이들이 과연 뭐라고 할까. 필자는 여기서 순수 예술인들을 매도하거나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대중가요는 야외 공연장이 어울린다는 ('89년도 성명) 발언의 대중 음악의 다양성에 대한 무식은 둘


째 치더라도 양쪽이 모두 발전해야 한다는 일말의 인식도 없는 사대주의자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폴앵카는 되고 이미자는 안 된다는 식의 사대주의도 웃기지만 대중 가수들의 개인적 이기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마치 클래식 공연장에서 공연을 갖는 것이 가수 자신의 품위를 올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둥바둥하는 모습은 후배들의 냉정한 비판만을 받을 것이다. 최근의 대중 음악인들은 클래식에 대한 컴플렉스 따위는 없다. 대중 음악은 클래식의 알량한 권위에 편승해서가 아니라 다른 체면치레의 이유로 특정 공연장에 서려 하는 행위는 순수와 대중 양쪽의 모진 비판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세계에 유래가 없는 망칙한 제도 할부대관료


다음은 체육관 공연이다. 세계 유명 라이브 앨범은 일본 무도관공연이 꽤나 많다. '무도관'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체육 시설이지만 음향에 대한 배려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든 주위의 이야기로든 우리나라의 번듯한 체육 시설 중 설계에 음향을 고려한 흔적이 보이는 건물은 없다. 그나마 우리 나라는 이런 시설조차 이용하기 힘들게 하는 세계에 유래가 없는 망칙한 제도가 있다. '할부대관료'라는 것인데, 할부대관료(예상 입장권 판매액의 15%), 소위 문예진흥기금(7%)등을 사전에 예치해야 한다. 할부대관료는 올림픽 공원 내의 체육관은 15%, 그 외 서울시 소유 체육관은 20%를 내지만 저 소위 문예진흥기금은 어떤 공연이건 무조건 징수다. 물론 전기, 수도, 하다 못해 의자 책상 하나하나도 다 미리 돈을 내야하고 현수막도 개당 요금을 내야 한다. 게다가 대중 음악 공연은 부가세 10%를 내야 한다. 클래식 공연의 경우 문화 진흥 차원에서 면제된다. 대중 음악은 장사요, 클래식은 문화라는 관료들의 시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 부가세다. 게다가 그 소위 문예진흥기금을 빼앗아 가는 것은 어인 일일까. 사실 알량한 전부의 지원 따위는 포기한지 오래된 것이 대중 음악인들이지만 지원은 고사하고 행방이 묘연한 세금을 낸다는 것은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공공시설인 체육관을 사채 업자나 시정 잡배 마냥 판매액을 떼는 것은 백주 대로에 길을 막고 통행세 내라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많은 국민이 관람하는 공연이 아닌 일반 기업의 각종 사내 행사는 기본 대관료(무료나 마찬가지)만 받는다는 사실에 이르면 도대체 이 나라가 국민이 주인인지 재벌이 주인인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지은 건물을 또 본전을 뽑으려 든다면, 국가가 장삿군인것이지 부가세를 내고 공연을 하는 대중 음악만이 장사가 아닌 것이다. 야외 공연장은 현재의 우리 상황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한다. 우선 관객이 '스스로 알아서 노는'풍토가 되기 전엔 관객의 통제가 용이하지 않고, 야외는 소리


의 울림이 없는 대신 충분한 용량의 음향을 내기가 어렵다. 또한 일기의 변화에 대처하기가 어려워서, 악천후에 대비한 경험 없이는 사고의 위험성이 있다. 연주자가 감전의 위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한 일본의 밴드가 스스로 자신들의 무대에 물을 뿜어 대면서 공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아직은 우리와 많은 간격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엔 우리 밴드도 빗속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장비 사이로 물이 들어가 기타리스트는 자신이 세팅해 놓은 것과 거리 먼 기타 소리를 들으며 황당한 표정으로 연주를 해야 했고, 드러머는 비에 젖은 페달이 미끄러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잡으며 연주를 했던 것이다. 연주자나 관객이 모든 상황을 감수한다고 해도, 야외 공연은 인근 주민의 문화적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다. 조금만 소리가 높아도 주민들의 원성 사기가 쉬운데, 도시 전체를 하나의 공연장 개념으로 만들었던 이사오 토미타의 린쯔 공연은 그래서 더더욱 부럽다. 소극장 부문은 현재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소극장은 기업이나 문화단체의 후원 아래 설립된 일부의 예를 제외하고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데, 운영자들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업주나 직원들 자체가 예술이 좋아서 자신의 소득과 상관없이 일하고 있는데도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린다고 한다. 공연의 내용도 소극장 형태가 주도해야 할 진보적이며 실험적인 내용보다는 벗기기 연극이 일단 손님을 모으는 형편이라, '문 닫지 않으려면' 타협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과거의 국내 밴드는 미 8군 무대와 유명 나이트 클럽을 중심으로 성장한 적이 있다. 영국의 문화적 모체는 클럽 문화다. 어두컴컴한 소규모 클럽에서 골수 손님 몇을 놓고 연주하다 보니 어둡고 실험적인 색채가 영국음악을 주도했고 훗일 이것이 세계를 정복했다. 현재 우리 나라는 마땅한 라이브 클럽이나 카페테리아에서의 연주도 전무하다시피 하다. 과거의 나이트 클럽(요즘의그것과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라서 음악적으로 진지한 관객들이 밴드의 연주를 들으려 몰려왔다고


한다.)이나 영국의 클럽 문화를 대체할 만한 것은 현재로선 소극장 문화뿐이다. 소극장이 대극장에서의 공연의 힘든 신인이나 통기타 가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소극장 나름대로의 색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이다. 


문화를 기형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토양들


매스컴 이외에 다양한 형태의 공연 문화를 접할 기회가 봉쇄되어 있다면 대중은 불행하며 문화는 기형적으로 성장한다. 지금의 우리가 바로 그렇다. 문화의 주인인 대중을 무시하고 매스컴이 휘두르는 천편일률의 프로그램에 질린 대중은 심지어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공연 문화를 창출할 아티스트나 수준 있는 대중이 없어서라면 몰라도 제도의 불합리나 재정적 문제 때문에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라 망신이다. 공연자 등록증, 공윤 심의 번호, 행사 기획서, 안전관리 계획서, 공연 심의서, 사업자 등록증, 공연 계약서, 관할 구청 신고, 저작권 협회 신고서... 이 종이 뭉치들을 보면서 '문화 보존'에 국가의 사활을 걸고 있는 프랑스를 생각한다. 이미 한번 남의 식민지가 외었었던 이 나라는 과연 배짱이 있어서 이런 것인가 아니면 문화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인가. 국방만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글 . 신해철(그룹 N.EX.T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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