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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첫가출을 겪으면서 성숙 


의욕에 차있었던 무한궤도가 한번 콘서트 무대를 가져보자는 의견을 모은 것은 활동을 시작한지 불과 3개월 정도 밖에 안된 지난 88년 봄이었다. 


'음악적 성숙도를 다하는데는 어렵게라도 콘서트등 라이브무대를 통해 실전경험을 쌓는게 최선택'이라는 내 주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진 직후였다. 


서둘러 숙명여고 이정숙 기념관을 공연장소로 구하고 졸속으로 '무한궤도 첫 콘서트개최' 포스터를 만들어 붙인뒤 불과 2주만에 콘서트무대를 가졌다. 나로서는 고3말 학력고사 직후 63빌딩에서 그룹사운드 부활이 콘서트를 할때 각시탈로 오프닝밴드를 맡은 이후 처음 서보는 공식무대였다. 


우리로서는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른 무대였지만 역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처음 스테이지에서는 너무 당황한 끝에 서로 손발이 안맞아 무슨 연주를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래를 하자니 목소리는 자꾸 기어들어가는 것만 같았고 등줄기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그러다보니 연주따로 노래따로 식으로 그야말로 볼품없는 무대가 연출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콘서트가 저렇게 엉성하냐, 빨리 끝내라'는 야유가 들리는 듯 했다. 


첫 스테이지에서 다소 열을 받은 멤버들은 하나같이 '이판사판이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다부지게 해보자'며 결의(?)를 새롭게 했다. 


그래서 다음 스테이지부터는 비교적 과감하게 우리의 색깔을 띠고 각종 장르의 음악을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이런게 어필했는지 공연 뒤에는 '아마추어 그룹의 첫 무대치고는 신선한 감각이 돋보였다'는 촌평을 듣기도 했다. 


당시 무대에서 노래를 하면서 느낀 것은 가능하다면 무관심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던 관중들의 환호소리가 야릇한 설렘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이런데 빠지면 내가 진정 추구하고 싶은 음악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무대에서의 이런 설렘이 있기에 지금 이처럼 노래를 하고 있는지고 모른다. 


무한궤도 출범이후 첫 무대였던 이 콘서트에서 그룹활동의 재미를 느낀 내가 그해 여름 그룹 아기천사에 가담해 <88 MBC강변가요제>에 참가했던 것은 이미 밝힌바 다르다. 


강변가요제 직후 이제는 정말 음악 이외의 것은 의미가 없고 음악을 하지 않고는 잠시도 견딜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한 무렵인 어느날이었다. 


이 날도 연습실에 있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좀 보자고 하셨다. 아마 대학에 들어간 이후 아버지가 정식(?)으로 날 부르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솔직이 대학에 들어가서 학점에 신경쓰는 것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해온 처지라 자칫하면 크게 꾸지람을 듣겠거니 걱정을 하면서 아버지 앞에 앉은 순간인데 느닷없이 "너 이 녀석 하라는 공부는 아하고 하루종일 노래만 부르면 다냐"며 다짜고짜로 내 뺨을 후려갈기셨다. 


난생 처음 아버지한테 맞아보는 사건(?)이었다. 손찌검을 당했다는 게 정말 이때는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 눈앞이 캄캄할 정도였다. 


자리를 일어나면서 참다못한 나는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아버지가 이러실 수가 있어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음악을 할겁니다. 두고 보세요"라고 말대꾸를 하고는 그 길로 곧바로 집을 나와 버렸다. 어머니의 만루를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오면서 서러운 생각에 얼마나 울음을 삼켰는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대학교 2학년때 첫 가출을 경험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못할 짓을 했다는 자책감과 후회 그리고 '정말 음악만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가'하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등 수많은 생각들이 얽혀 나를 괴롭혔다. 


일단 집을 나온 이상 이런 복잡한 감정들을 정리하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답을 구할때까지는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번 어려운 생할에 부딪쳐보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 


가출행각을 벌이면서 친구들을 불러내 용돈을 얻어쓰기도 하고 친구네 집을 전전하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5천원짜리 싸구려 여인숙 신세까지 졌다. 


나중에는 마땅히 잘 곳이 없어 공원벤치에서 열흘 가까이 노숙을 하면서 1백원짜리 풀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는데 '음악을 할 수 밖에 없다'는데 생각이 모아지면서는 견딜만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집에다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나온 게 그렇게 시원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누가 뭐래도 이젠는 떳떳이 음악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가라앉는듯 했다. 


이렇게 학교도 나가지 않은채 이십일쯤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접고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거지꼴이 다되어 들어온 나를 아버지는 여느때처럼 대하셨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어머니와 고모들이 진짜 잘못되게 전에 아무 말씀 마시라고 어렵게 설득을 하셔 아버지가 묵인(?)하시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사람은 어려운 고비를 겪으면서 성숙한다고 하는데 내 경우에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스스로도 내 자신이 이전과는 뭔가 크게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부쩍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우선은 성격적인 면에서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변했다. 남앞에서는 좀처럼 내 생각을 자신있게 밝히기를 어려워하고 원하는게 있어도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타입이었는데 이런게 달라졌다. 비교적 자신에 보다 솔직해지고 대담해진 것 같았다. 


누가 무슨 악기를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한수 배우고 싶다'는 의사를 과감히 밝힐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한게 사실이었다. 부활의 리드기타였던 김태원선배한테 기타강의 좀 받자고 귀찮게 군 것도 이 무렵이다. 


오죽 끈질겼으면 그 당시 '불가시리'란 별명까지 얻었겠는가. 음악을 하는 친구들도 "해철이만큼은 못말린다"고 할 정도였다. 


이같은 성격의 변화로 음악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발산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음악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웬만한 곡의 기타플레이는 한번만 듣고도 그 자리에서 내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을만큼 귀도 뻥 뚫리고 음악적 감각도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이전과는 정말 비교가 안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늘기 시작했다. 악상도 수시로 떠올라 작곡도 하루에 한곡씩 해낼 정도였다. 


88년 12월 MBC대학가요제 수상곡인 <그대에게>의 곡을 만들고 노랫말을 붙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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