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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외곽을 감싸고도는 순환 도로인 M 40는 영국 특유의 - 비도 아닌 것이 안개도 아닌 것이 헷갈리는 - 짙은 구름형 안개비가 내릴 때면, 오렌지색 가로등의 길게 휘어진 행렬이 마치 달무리처럼 번져 몽환적인 빛의 행렬을 연출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해가 떠오르기 전 서둘러 잠자리에 들기 위해 이른 새벽길을 달리다가도, 문득 감상에 젖어 잠시 차를 세우고 길가에 발을 딛으면, 이미 양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어 텅 비어버린 목장의 펜스 아래 검고 축축한 흙의 감촉도 상쾌하려니와,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그 식물들이- 모가지가 길어 키는 일미터가 훌쩍 넘고, 이파리는 없으되 둥그런 솜털 공처럼 생긴 얼굴만이 공중에 동동 떠다니는- 언덕께에 도열한 광경은 마치 내가 당장 화성에라도 떨어진 듯한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드랬다.

그 날은 해가 질 무렵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교외 지역인 메이든헤드에서 런던으로 차를 달리던 길이었다. 
아, 이야기에 앞서, 아시다시피 런던의 자동차 진행 방향은 우리와 반대다. 새벽녘에 길에 차가 한대도 없을 때 무심코 우리 식으로 운전을 하다보니 내가 중앙선 반대편으로 뽈뽈뽈 차를 몰고 한참을 가고 있던 중이어서 식은 땀을 흘린 적도 있다. 핸들이 붙어있는 것도 우리와 반대로 오른 편이고, 게다가 수동기어가 대부분이라 왼손으로 변속기어를 움직여야 한다. 젠장, 그런데 악셀레이터와 브레이크, 클러치는 우리와 같은 순서다! 게다가 핸들은 파워 핸들이 아니라 인력을 최대한 사용해야 하는 파워 핸드(power hand), 기어는 오토매틱이 아닌 손토매틱(son-tomatic), 선루프랍시고 있긴 한데 폼 안나는 수동식 손루프(son-loop)의 삼위일체형 풀옵션.
내가 런던 도착 첫날부터 그런 자동차를 몰수 있었던건 순전히 전자오락의 덕으로, 왼손으로 레버를 조작하고 오른 손으로 스위치를 누르는 고도의 작업을 일생에 걸쳐 해왔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심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상대적으로 점잖게 운전을 하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그닥 코리안 스타일 수퍼 러쉬를 보여 줄 이유도 없었기에, 그날도 나는 나답지 않은 운전을 하고 있었다. - 깜박이를 켰단 말이다!!(우워~~박수)

알려진 바와 같이 깜박이는 차선 변경 시, 1.백밀러로 공간을 확인-2.깜박이 켬-3.적절한 속도로 차선 변경 변경-4.깜박이 끔 이런 순서로 조작한다. . . 라는데에 동의 해야만 면허 필기 시험을 합격시켜 준다. 하지만 서울에서 어느 미친놈이 그렇게 운전을 실제로 했다고 치자. (미친놈 여러분 죄송) 1. 백밀러로 공간을 확인(반응 1-1 뒷차 옆차 모두 기냥 있음) 2.깜박이 켬(2-2 오잉 저놈바라 라는 반응과 함께 격렬히 속도를 올려 못들어 오게 막음) 3.결국 차선 변경 블로킹 당함(3-2옆차에서 씨익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난 1단이야” 라고 말함. 모 자동차 씨에푸를 상기하시라)4. 깜박이 끄고 욕함. “씹쉐이...” (4-2ㅋㅋㅋ)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차선변경은 어찌 이루어지는감? 1. 백밀러 힐끗 보는 듯 하다가 엥간하면 기냥 밀고 들어간다 - 2.차선변경이 이루어지는 거의 동시 혹은 직후에 깜박이를 켠다 - 3. 만일 사고가 났다면 차에서 튀어내림서 “이 개@#$%^&&** 눈깔은 @#$%^냐” 라고 바락바락 소리지른다(목소리 큰놈이 이긴다) 4. 사고까지는 안났더래도 놀란 뒷차가 신경질 적으로 클락션을 누르면 웃으면서 브이자를 그려 보여준다. 이게 한국 스타일 운전법이다. 모두 동의 하시는지?

각설하고, 매우 우아틱하고도 고상하게 깜박이를 넣고 좌측차선으로 살포시 옮겨가려는 순간, (회상해 보건대, 내 인생에 그렇게도 점잖고도 위선적인 순간은 정녕 많지 않았으리라.)
뒤쪽에서 따라오던 한 영국놈 차가 하이빔을 내차의 엉덩이에 번쩍번쩍 날리는 것이었다. (주 1. 물론 그 차가 영국에 관광온 우간다놈이나 인도놈 차였을 수도 있겠으나 그냥 확률상으로 영국놈 차인 것으로 해두자. 그래야 얘기가 진행이 된다. 또 여기서 영국놈이란 스코틀랜드 놈과 웨일즈 놈을 포함한다. 아, 친절해라.
주 2. 운전면허가 없으신 분들을 위해 하이빔이 무엇인지 설명하자면 헤드라이트의 각도를 들어올려 전방을 훨씬 더 밝게 보게 해주는 기능으로, 레버를 탁탁 두들겨 번쩍이게 함으로써 모종의 신호로도 사용하는데, 주로 우리나라에서는 a. 꾸물대지 말고 비켜 씹새야 b. 들어오지마 죽여버린다 등의 신호로 사용되며 타 운전자를 보조하기 위한 용도로서는 고속도로 반대편 주행차량이 이쪽에 경찰있다 다 도독놈새끼들이니 돈 뜯기지마 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유일하다)
주가 너무 길어 얘기가 끊긴감이 있다만, 한국이었으면 하이빔을 내 엉덩이에 날리거나 말거나 함 박아바라 도로교통법상 너 혼자 독박이다 하고 밀고 들어갔겠으나, 춥고 배고픈 유학생활, 예술인 자격으로 유학을 왔으면 다른건 몰라도 문화부분만큼은 철저히 배우고 본받아 고국에 전하자라고 혼자 감격해하며 결심한바 있기에 ‘신해철 성질 다 죽었다...’하고 핸들을 돌려 이를 악물고 원래 차선으로 돌와왔다. 속으로 미어(美語)에서 쓰이지 않는 영국식 욕을 몇마디 날리며 악셀레이터를 밟아 거리를 훨씬 더 벌린후, 다시 정녕 우아하게 깜박이를 켜고 다시 차선을 옮기려는 순간, 허, 이, 씨, 방, 새...가.......................

다시 하이빔을 내 엉덩이에 번쩍번쩍 날리는게 아닌가!!!

순간, 뚜껑이 날라가며 내 차의 손루프를 뚫고 인공위성 궤도를 향해 불을 뿜는 장면이 시야에 아릇하게 사라지며, 그것이 아마 내가 이성을 유지한 마지막 순간이었던 것 같다.
‘같다’ 라고 함은 그 이후의 기억이 아드레날린의 강력한 분비로 말미암아 매우 흐릿하기 때문인데, 기억의 파편들을 조합해보면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영국식 욕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강력한 한국어의 연쇄적 욕설로 대치되었다.(ex. 개 호랑방탕 말죽거리 고쟁이찌꺼기같은 영국놈들 졸라 점잖은 척만 하지 운전 좆같이 하는건 우리나 니놈들이나 똑같자나!!)
2. 하이빔을 때리거나 말거나 무조건 차선을 변경한 후 급브레이크를 밟아 갑자기 거리를 줄임으로써 뒷차를 시껍하게 만들어주었다.(경부고속도로에서 단련한 스킬이다. 아마추어는 흉내내지 말 것)
3. 다시 한번 옆차선으로 급차선변경한 후 또 급브레이크를 밟아 뒷차를 지나쳐 보내버린 후 그 차의 후미로 따라붙어 조준선 과녁안에 집어넣었다.(영화 탑건등에 나오는 공중전 스킬이다. 역시 아마추어는 흉내내지 말 것)
4. ‘앞차’가 되어버린 예의 그 ‘뒷차’를 향해 마구 하이빔을 날려 주었다.(스타워즈에 나오는 제국군과 스타파이터의 공중전 장면이다.)
5. 기관총을 쏘다 보면 간헐적으로 결정타 미사일이 나가야 하는 법, 중간중간 요란하게 클락션을 울려주었다. (대~~한 민.국. 의 타이밍이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월드컵 이전이라..)
6. 이 타이밍에서 하늘을 향해 호탕한 웃음과 함성을 날려주었다. “하...죽을려고 씨방새가...얌마, 내가 대.한.민.국.운.전.면.허.야 UN 가입국가중에 대한민국 면허한테 개기는 놈이 있네 캬캬캬”
7. 휘청거리는 앞차를 향해 다시 악셀레이터를 밟아 거리를 0.5cm로 유지한 후 무려 20분을 스트레스 받아 죽기직전까지 몰아붙혔다. 아마 걔는 운전하면서 울고 있었을 꺼다.(요즘도 가끔 궁금하긴 한데, 그 놈... 나이지리아놈이었으면 어떡하지?)

상상하시는 바와 같이 전투는 대한민국 교통계가 배출한 수많은 뛰어난 파일럿 중의 하나인 신해철 선수의 일방적 승리로 막을 내리고, 나는 탑건의 파일럿이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속에 항공모함 위에 착륙하듯 녹음스튜디오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날의 무용담을 동료들에게 (물론 영국놈들이다. 특히 그중의 하나는 강력한 서든 잉글랜드 악센트로 인하여 영국생활을 마칠때까지 밥먹었냐 말고는 별로 의사소통이 안된 놈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철 : “그래서 그놈이 나한테 하이빔을 두 번 탁, 탁, ....”
Greg : “그래, 그거 너를 인지(notice) 했으니 안전하다, 들어와라라는 신호아냐...”
해철 : “.............(웨이러 미닛)...............” (배경음악 : 조스 테마)
Cris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해철 : “............(오 마이 곳 - 영국악센트임).............” (배경음악 : 계속 조스 테마)

순간적으로 내 잔대가리는 조국의 명예를 구하기 위해 엄청나게 빠른 알피엠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침착해라 해철아, 여기서 생각을 잘 해야한다, 말 한마디면 좆되는 수가 있다, 우리 한국인의 이미지가 생뚱맞은 영국놈덜에게 어떻게 각인되느냐가 이 한마디에 달려있다...

(배경음악 체인지!! - 샤방한 효과음과 함께 눈반짝이는 요정 두 마리 좌우로 크로스되며 감동적인 ‘캔디’의 주제가가 흐른다.)

해철 : “우웅...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 오 그래 안전하니 들어와라는 뜻으로 하이빔을 세 번 탁탁탁 치거든.............................. 그런데 너네는 두 번 탁탁 치더라구...그런 문화적 차이의 원인이 뭘까 궁금해서 그러지....(눈 반짝반짝)”
Greg : "...“
Cris : “...”
Phil : "..."
해철 : “...”

그 날 새벽 다시 M 40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도저히 악셀레이터를 밟을 마음이 나지를 않았다. 예의, 양들이 자러 간 텅빈 목장의 펜스 옆에 차를 세워두고, 부슬비를 맞으며 착잡한 마음속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자동차는 다 똑같은 자동차다. 영국자동차도 자동차고 한국 자동차도 자동차다. 핸들방향은 달라도, 바퀴숫자도 헤드라이트도 그리고 하이빔도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왜 똑같은 '하이빔‘이라는 기능을 우리는 남을 견제하고 내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 사용하며, 왜 그들은 남을 보조하고 돕는데 사용하는걸까. 나는 이 대목에서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소름이 끼치도록 유사한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불교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지옥에 가면 산해진미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져있다고 한다. 끓는 기름가마솥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들에게는 오잉?-할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계속 들어바바라. 근데말이다, 문제는 젓가락이 전장 2미터짜리라는 거다. 그러니 음식을 집어 먹으려고 하면 입에 골인이 될 턱이 있나(팔길이가 2미터가 넘는 놈은 먹을 수도 있겄다.) 하여, 눈앞에 그득한 산해진미를 쳐다보기만 할뿐, 끝없는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는 얘기다. 그러면 천국은 어떠냐....
천국에 가면 역시 산해진미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져 있다고 한다. 게다가 전장 2미터 짜리 젓가락 이야기도 똑같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서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사람의 입에 음식을 서로서로 먹여주기 때문에 늘 배가 부르고 서로서로 화목하다는 얘기다.(감동이지?)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속옷이 젖어왔다. 저 바다 건너편에 나랑 똑같은 머리칼의, 똑같은 피부의, 똑같은 눈동자의 내 동포들이 산다. 여름이면 동네 목욕탕이나 다름없는 인간들 바글바글한 바닷물 구석에 발이라도 한번 담구기 위해 주차장이나 마찬가지인 ‘고속도로'에 대가리를 디밀고, 미어터질 듯한 반도땅에 수천만명이 옹기종기 모여산다. 아침에 출근길을 나설때면 가족들에게 보여주던 미소를 얼굴에서 거두고, 건드리면 죽여버릴테다라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역시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버스와 전철에 허겁지겁 뛰어오르는 ’경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수출 백억불이 달성되면 온 국민이 부자가 되는 것처럼 뒤떠들던 70년대에서부터 소위 ‘선진국’의 문턱이라고 자부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우리 한국인은 늘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구리처럼 잔뜩 배를 부풀려 허세를 부리고 남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 가를 죽어라고 의식해왔다. 
하지만 선진국이란 과연 무엇일까. 오이씨디 가입국이라고 해서 과연 우리가 선진국일까? 빌어먹을, 오이를 인터넷에서 다운받아서 씨디로 구우면 그게 오이씨디지 우리네 삶과 그게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경제지표의 백분의 일만큼도 실제적인 삶의 질을 누리지 못하면서도 입만 열면 경제경제를 뒤떠든다. 손에든 만원짜리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내 손에 십만원만 들어오면 행복해지리라고 믿는다.

유학을 와서 박사학위를 고국에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겠고, 사업을 하러 와서 실적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도 잇겠으나, 영국식 도제교육으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는 나는 눈에 보이는 변변한 사설 녹음학원 졸업장 하나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을 터. 옳거니.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가지고 고국으로 가리라. 그래서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목이 터지게 지랄하리라. 
우리가 힘겹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경제지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십만원 가진 놈 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손에 쥔 만원 어치 만큼은 행복하게 살아야하지 않느냐고. 그럴 권리가 있지 않으냐고. 하지만 손에 쥔 만원은 커녕 천원 어치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가 아니라 문화가 삐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영국놈도 미국놈도 나이지리아놈도 인도놈도 일본놈도 우리처럼 인상을 쓰며 살고 있지는 않다고.

양치기가 양들을 몰고 나오는 새벽 무렵에야 나는 차에 시동을 켜고 자리를 떳다.

PS. 아까의 지옥이야기에서 젓가락을 부러뜨려서 먹으면 되잖아라고 말씀하신 분, 혹은 젓가락 버리고 손가락으로 집어먹으면 되잖아라고 말씀하신 분은 참 똑똑하신 분이다. 한가지 궁금한 점을 여쭤봐도 될려는지? “너, 친구없지?”

PS2. 오히려 영국사람들이 차에 대해서는 더 검소하다. 그들은 키가 2미터 가까이나 되는 거구가 조그만 경차에 자신을 밀어넣듯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 매우 흔하며 어색하지가 않다. 우리처럼 티코가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급정거한 이유는? - 껌에 붙어서라는 둥의 못된 농담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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