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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Oct

기타 팬민정음

작성자: anonymous 조회 수: 2850

팬민정음 2편

사방 천지에 알려진 나의 실체와 실제의 모습이 서로 맞지 않으므로, 이에 팬민정음을 편찬하여 최소한 어린 팬들 사이에서 오해나 왜곡이 수정되어 서로 진실한 모습을 바라보기를 바라노라.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다보면 보통 한 5분 만에 꼭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저... 듣던 바와는 많이 다르시네요.”
그러면, 짓궂은 나는 과연 ‘듣던 바’ 가 무엇인지를 꼬치꼬치 캐물어본다. 그들의 ‘듣던 바’란, 신해철은 카리스마-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카리스마 적’ 이란 단어를 풀어헤칠 경우, “거만하고 프라이드가 높으며 신경질적이고 논리적이고 박학다식하여 기자들의 질문 중 빈틈을 용서 없이 찾아내고, 질문이 일정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잔인하게 쪽을 주며, 종국에는 상대방을 울리고야 만다”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나를 인터뷰하러 왔다가 나의 맹렬한 공세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집에 간 여기자가 5명이라고 하는데, 나는 정말이지 그 5명중에 한명이라도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그렇다면, 듣던 바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외로, 게다가 “실망스럽게도” 1대1 인터뷰를 감행할 경우 신해철은 부드럽고 매너가 좋으며 시간을 초과해도 매니저들을 제지해 가면서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하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많고 예의도 깍듯하며 분위기를 편안하게 풀어간다 라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기자들은 나의 이런 모습에 대해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할 때도 있다. 그들은 뭔가 대단히 유니크하고 성깔 있는 존재를 취재하고 싶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우리 사회에 많이 존재하는 그저 그런 유쾌하고 부드러운 캐릭터더란 거다.
날보고 어쩌라고. 다음 인터뷰 때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천장에 매달려 있다가 식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착지하여 “인터뷰 시작이다. 30분 내로 못 마치면 너는 죽는다.” 하고 소리나 질러볼까. 

어린 시절의 나는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며 느릿느릿 만사태평이고 특별히 손이 갈 필요가 없는 수줍고 조용조용한 아이였다. 믿거나 말거나.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올라오시면 무릎을 꿇은 채로 저린 다리를 몰래 몰래 주물러가며 기나긴 훈시를 듣기도 했었고, 다른 꼬마들이 엄마 아빠 하고 부를 때, 나는 어머니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하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도록 엄하게 교육을 받았다.
형제라야 누나와 나 단 둘이지만 10명에 가까운 고모와 삼촌들 사이에 섞여서 자랐으므로 우리 집에서 가장 큰 죄는 자기 입만 챙기는 것, 자기만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고, 이기적인 행위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집단생활 내지는 단체 생활이었던 셈이다.
나는 말하기 보다는 조용히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더 선호하는 캐릭터였고 그래서 나의 별명중 하나는 애늙은이 혹은 영감태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음악계에 나와 보니 이곳은 살벌한 전쟁터였다. 그 이전에 내가 겪었던 세계는 내가 예의를 지키면 상대방도 나를 그렇게 대해 주리라는 보장이 있었고 거만할 필요도 비굴할 필요도 없는 정상적인 세계였는데, 연예계는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굽실 거리면서 비굴한 웃음을 짓거나 그렇지 않으면 싹아지 없고 거만한 놈으로 찍히거나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택해야만 하는 비정상적인 세계였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사실은 전자를 택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아티스트 알기를 머슴보다 못하게 여기는 PD놈, 아무대나 쌍욕을 찍찍 갈겨대는 매니저들, 가수들은 대중들 앞에서 끝간데 없이 공손하고 굽신거려야 한다라고 믿는 대중들 사이에서 나의 선택은 어느새 후자로 정해져 있었다.

학교 다닐때 조차 싸움한번 해본적 없었던(생각해보니 두 번 있었다.) 착한 아이였던 나는, 스무살에 험한 연예계 바닥에 들어와 정말 미친개처럼 싸웠다.
무대 위에 올라가 팬들이 지켜보는 상태에서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개색희 소색희 욕을 퍼부은 엔지니어를 쇠파이프로 찍었고,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으면 같은 소속사 동료가수들에게 보복하겠다 라는 PD의 얼굴에 뜨거운 커피를 쏟아주었고, 1분 1초가 바쁜 라이브 공연장에서 주머니에 손을 꼽고 어슬렁거리는 스태프에게 마이크를 집어던졌고, 야외 공연장에서 대기실을 마련하지 않아 가수들을 추위에 떠는 행려병자꼴로 방치해 놓은 방송사의 무대위에 올라가 짱돌로 무대세트를 부쉈고, 역사상 한번도 끝까지 소송이 진행된 적이 없다라는 거대 언론 스포츠 신문사를 악랄하게 물고 늘어져 손해배상을 받아냈다.

그러기를 어언 18년, 나는 이제 싸울 일이 없다. 케이블 방송에 출연하면 사장실을 비워 특별대기실을 만들어주고 공중파 방송에 나가면 부장급 PD가 직접 커피를 타서 들고 오며 공연장에서는 전 스탭들이 부동자세로 바짝 얼어 나의 명령을 기다린다. 그 대신 나의 이미지는 건드리면 벌집 쑤시는, 정말 좃같은 색끼가 되어버렸다. 물론 후회는 없다.

가끔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누가 착한 신해철을 원하겠느냐.” 우리나라에서는 연예인이 사회의 도덕적 롤 모델이 되어야 하는 정말 괴상하다 못해 요상망칙한 사고방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거의 예외 없이 연예인들은 대중들 앞에서 극도로 공손한 태도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도 살아남은 경우란 지극히 드물다. 이러한 풍토에서 지 꼴리는대로 질알발광하는 나 같은 캐릭터가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우리 사회라는 커다란 연극 속에서 나에게 맡겨진 배역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나이트에서 나와 부킹을 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길 바란다. 당신이 생각하는 신해철은 나이트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주위사람들을 부려먹는 캐릭터겠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유흥업소 웨이터에게도 절대 반말을 하지 않으며 무도장에서 처음 본 여성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무안을 주는 후배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소한 술 한 잔이라도 권하고 그 다음에야 “저 저희들끼리 좀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하고 무안하지 않게 보내는 것이 부킹의 도라고 본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만났을 때도 상대방이 말씀 편하게 하시죠 라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당연히 존댓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20년쯤 위라도 정말 나쁜 색끼일 경우에는 사전에 나오는 모든 욕을 퍼부어주고 발차기도 날린다.)

‘신해철의 성깔’을 재미있어 하는 일부 팬들은 내가 더더욱 그러한 캐릭터에 부합하기를 바라고 역시 지 꼴리는대로 마구 휘둘러야 신해철이지 하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방식으로 넥스트를 운영할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나는 나보다 나이가 10살 이상 어린 멤버에게도 명령조의 말투를 사용하지 않으며 커피 심부름 따위의 후배들에게 시킬법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내 또래의 멤버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다. 넥스트에게 있어서 ‘명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권유와 설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 신해철’의 캐릭터를 원한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랄까
 

2006년 12월 08일

출처: nextf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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