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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성장과정 


88년 겨울 대학교(서강대 철학과) 2학년때 나는 그룹 '무한궤도'의 일원으로 MBC대학가요제에 참가해 <그대에게>로 대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가요계에 출사표를 던진지 불과 1년 6개월만에 소위 인기가수가 됐다. 


'무한궤도'에서 다져놓은 음악적 기반이 그 밑거름이 됐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갑자기 유명가수가 된 것 같다. 정말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는 말이 실감이될 정도다. 특히나 어려서부터 음악적 소양이 전무(?)하다고 믿었던 내가 이처럼 음악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을 정말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누구보다도 나를 표현해 내 가족들은 아직까지도 '신해철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이 언뜻 실감이 안될 정돌로 몹시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이같이 큰 배경과 나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는 내 성장과정을 언급하는게 우선일듯 싶다. 


1968년 5월 6일 나는 중구 회현동의 한 병원에서 아버지 신현우(57)씨와 어머니 김화순(55)씨의 외아들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내 위로는 나보다 2살위인 누나(신은주-25)가 있다. 


약대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 하시던 약국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셨다는데 사업이 잘되서인지 내가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자가용을 굴릴 정도로 비교적 부유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외아들인 내가 응석받이로 자랄까봐 그러셨는지 10남배중 장남이셨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나를 의식적으로라도 장남처럼 엄하게 키웠던 것 같다. 놀다가 넘어져도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한번 일으켜 세워주신 적이 없을 정도였다.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 나는 아버지한테서 '너는 남다답게 으젓이 여자인 누나를 감싸주고 어려운 일에는 네가 나서야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누나에게는 '네가 누나니까 부모가 없을 때는 네가 엄마노릇을 해야하고 무엇이든 동생에게 양보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막내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자라면서는 늘 오히려 누나의 오빠(?) 노릇을 할만큼 조숙했던 것 같다. 


국민학교 4학년때에는 6학년이었던 누나에게 반의 남자아이들이 짓궂게 한다기에 다짜고짜로 6학년 교실에 쳐들어가 '아무개자식 나와라 밟아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칠 정도로 기백(?)도 있었다. 


내가 태어난 뒤 얼마안돼서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이 번창해 나는 꽤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집스러우리만치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아버지는 바깥일 못지 않게 가정에도 충실해 우리 남매에게는 더할나위없이 자상하셨다. 어머니 역시 우리들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 엄마보다 더 좋은 사람이 없다고 느낄만큼 나와 은주누나한테 애정을 쏟았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오신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한 뒤 줄곧 아버지 내조만 해오셨는데 아버지를 얼마나 신뢰하시는지는 몰라도 지금껏 어버지 의견에 반대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무튼 우리집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단란한 가정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나중에 음악을 한다고 설쳐대면서 집안을 좀 시끄럽게 하긴 했지만 (사실 지금도 그렇다) 우리집은 이 땅에 흔치 않은 화목한 집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지금도 내가 아니 우리 누나까지 포함해 이런 집안에 태어나게 된 것을 세상에서 받은 가장 큰복이라고 여기는 것도 이같은 연유에서다.


비교적 생활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인지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에게 일찌부터 예능교육을 시키셨다. 누나와 나는 모두 4살때부터 피아노교습을 받았는데 천주교신자로 평소 종교음악에 큰 관심을 가지셨던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좋은 음악교육을 받게하려고 꽤나 마음을 쓰셨던 것 같다. 


아마도 마음같아서는 누나나 나 둘중에서 불세출의 음악가가 한명쯤 나와주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바람은 나에게 음악교육을 받게한지 얼마안돼 산산히 무너졌을 것이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유치원시절 내게 피아노레슨을 해주시던 선생님이 하루는 어머니를 오시라고해 내가 영 마음에 안들었는지 "해철이를 피아니스트로 키우실 생각이신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몹시 당황한 어머니가 "아뇨, 그저 취미삼아 피아노를 배워두게 하려는 건데요"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기다렸다는듯 "그럼 다행이군요"라고 말을 받았다. 


어렸을땐데도 나는 두사람의 대화에서 내가 음악에 소질이 없는 애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미술을 전공했던 삼촌과 이모들을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음악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가 더 좋았고 스스로도 오히려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느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을 들었는데 6살때인 73년에는 전국아동미술실기대회에 나가 우수상까지 받았었다. 사립국교인 미아리의 영훈국민학교 시절에도 교내 사생대회에서는 빠지지 않고 상장을 차지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가 그래도 미술보다는 음악에 더 마음이 끌리셨던데 있다. 물론 나도 악기를 다루거나 음악소리를 듣는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지만...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내 피아노실력은 좀처럼 향상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4학년때 나를 영훈국교 브라스밴드부에 가입시켰다. 아마도 '좀더 음악적인 환경에서 지내다보면 감춰져 있을지 모르는 음악적 자질이 언젠가는 나타날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셨던지 모른다. 


피아노에 싫증을 느끼던 차에 나는 밴드부에서 내 마음에 드는 클라리넷을 선택해 불게 됐는데 클라리넷도 역시 별반 재주가 없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밴드부 지도선생님은 툭하면 나를 보고 '너는 인사성도 바르고 공부도 잘하는데 클라리넷은...'라며 못내 안타까워 하셨다. 이럴때면 나는 어린 마음이었지만 '왜 이렇게 나는 음악에 소질이 없을까'라는 생각에 몹시도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악기를 다루는데 소질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부모님을 닮아서인지(?) 노래를 부르는데도 영 소질이 없어 유독 음악점수만은 늘 다른 과목성적에 비해 최하위를 면치 못했다. 


음악기말고사를 노래실기로 대치하든가해서 교실에서 노래시험을 치를때 한곡을 끝까지 불렀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반친구들은 내가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더 못들어주겠다'는 듯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다가는 마침내 '와'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리고 말기때문이다. 이 정도였으니 반에서 음치측에 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에는 어쩌면 그렇게 노래를 못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처럼 무대에서 내노라하며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게 좀 우습기도 하고 묘한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좀 조숙했던 탓인지 나는 국교 5학년 말께부터 소위 '헤비메탈사운드'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물론 헤비메탈이 뭔지도 몰랐지만 가끔씩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런 음악이 시원하게 가슴에 와닿은게 계기가 됐다. 노래를 못한다는데 대한 반발심리가 적용해 무의식적으로 그런 음악을 듣는데 더 열중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어린 나이에 뭣모르고 듣는 음악이었지만 귀가 멍멍할 정도로 때려부수는 듯한 그런 광란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후련하고 충만한 느낌을 받았던게 사실이다. 


집에서 장남으로 키워지고 또 그런 대접을 받았던 나는 그런 탓인지 적어도 집안에서만큼은 의젓한 장남답게 꽤나 묵직하게(?) 굴었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혼자 있을때는 공부를 하건 다른말을 하건 늘 헤비메탈을 들으며 나만의 시간을 즐기곤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러니까 80년째에는 '스콜피온스'등 유명한 외국의 헤비메탈 그룹의 이름을 하나둘씩 들먹일 정도나 됐다. 이때는 물론 피아노나 클라리넷을 다루는 시간보다 오히려 음악을 듣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이처럼 음악과 접하는 시간이 많았는데도 음치의 한계를 벗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게 문제였다. 국민학교 때의 음치가 중학교에 들어간다고 갑자기 달라지겠는가. 


중동중학교 1학년말경 변성기를 겪으면서 목소리가 좀 다듬어지는 것(?) 같았으나 역시 노래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음악을 듣는 쪽으로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국교시절에 이미 헤비메탈에 맛을 들였던 전력(?)이 있는지라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그야말로 대책없이 헤비메탈과 팝송등 외국대중음악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됐다. 


라디오 인기음악프로를 배놓지 않고 듣는건 물론이고 청소년층에 인기가 있다는 음악잡지란 음악잡지는 모조리 섭렵하며 정말 물불 안가리고 대중음악지식을 축척(?)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때는 음악을 무조건 듣는 것보다는 적어도 그 음악의 가수나 연주자를 알고 음악에 접한다는게 훨씬 괜찮아 보였고 어쩐지 멋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드폰을 끼고 있는 나에게 친구들이 "너두 무슨 노래듣냐"고 물을 때면 곡명과 외국가수나 그룹의 이름을 거침없이 대며 폼을 잡는 것도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았던 게 사실이다. 


중학교 2학년말쯤부터는 너무나 외국팝음악에 박식했던(?) 탓인지 친구들 사이에서는 내가 '신팝칼럼니스트'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것이 팝송가수나 유명한 기타리스트들의 이름만 대면 그들의 신상명세와 근황이 절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곡이 누구의 몇집앨범에 수록해 있다는 것도 컴퓨터에 입력해놓듯 외우고 다녔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려서부터 꽤나 유별난 구석이 많았던 것 같다. 더구나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직후에 터진 아버지의 빚보증사건으로 중학교시절 내내 집안이 편치 않았던 상태에서 그러고 다닌 걸 보면 더욱 그렇다. 


내가 국민학교 때까지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친구의 채무연대보증을 서준게 잘못돼 아버지는 더이상 사업을 할 수 없게 파산을 했고 우리집은 집 한칸만 가까스로 건지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물론 생활을 꾸려나가지 못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넉넉하게 살다가 갑자기 살림이 쪼들리니까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바로 이런 고비들이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되는게 아닌가 싶다. 


그때 나는 부모님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헤아리고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편치 않은 부모님들이 나때문에 속을 끓으시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 방법으론 학생인 내가 학교에서 부모님이 만족해하실만한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언급한대로 팝송등 대중음악을 그렇게 즐기면서도 나는 내 다짐대로 어쩌면 오로지 부모님을 배려(?)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최상의 성적을 유지하도록 애썼다. 중학교 3년내내 반에서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고 3등밖으로 떨어져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정말 거짓말 같다. 


오로지 부모님 덕택이었겠지만 나는 중학교 2학년땐가 실시된 IQ검사에서 150을 받았다. 아마도 전교에서 두세째쯤 되는 IQ점수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뭔가 잘못돼 너무 높게 나온 IQ점수가 아닐까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고보면 중학교시절 정신없는 음악소리에 묻혀 공부를 했는데도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이 순전히 IQ덕분이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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