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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Oct

밴드이야기 무한궤도

작성자: 관리자 조회 수: 3101




1.


드러머 조현찬의 집 지하실을 연습실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현찬의 부모님들은 사실 무한궤도의 가장 큰 공로자 분 들이다. 

고교시절에는 '연습실'이라는 이름의 렌탈리허설룸을 가곤 했는데 A실이 12,000원, B실이 8,000원 정도였다.
근데, 당신 같으면 어느쪽을 택하겠는가… A실에서는 전기에 감전되고, B실에서는 쥐가 나온다면..  

게다가 학생들 용돈이라는게 뻔한데 모든 맴버들 주머니를 털어봐야 500원쯤 모자라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면… 
그런면에서, 그 지하실은 머 방음이 되어있던 것도 아니고, 탁구대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한 쪽켠에서 연주를 하던 거지만, 전기도 안올랐고, 쥐도 안나왔으며, 무엇보다도 공짜였다.(게다가 가끔 간식도 제공된다!!!) 

그러니 연습 분위기 라는 게…밴드 연습이라면 보통 머리에 두건 두르고 
팔에 머 달고 "I hate the world, I hate everything…and  nobody loves me" 라는 
표정으로 인상 팍팍하고 쓰는 게 연상되겠지만, 
우리는 부모님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연습하는 정말정말 굳 보이 밴드 였던 거다. 
이 '굳 보이 밴드'의 이미지는 무한궤도를 띄우는데 막대한 역할을 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적지않은 반항심도 축적하게 된다. 
시험때는 연습이 없었다. 맴버들이 성실하게 학업과 밴드를 병행하는 동안
나는 남는 시간을 학교 앞 만화가게에서 보냈다. 

내가 원하던 것이 학교에는 없거나, 최소한 나로서는 발견 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초조함과 룸펜의 나날로 내 몰았다. 
어쨌든, 연주할 수 있는 곡 목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무대 위 에서의 우리를 시험하기 위한 몇 번의 짧은 공연, 예를 들어, ' 부활'의 오프닝 밴드역할 같은 것에서  관객들의 적지 않은 환호를 받고, 상당한 자신감을 얻은 우리는 우리의 첫번째 단독 공연을 기획했다.
       
선배밴드들의 공연 스태프로 이런저런 일을 해본경험으로 대략의 진행정도는 
알고 있었던 내가 주로 진행을 했고, 아쉬운 점들은 맴버들 이 이리뛰고 저리뛰어 해결했는데, 

특히 친구 들을 통한 공연 티켓의 강매에서 놀라운 수완들을 발휘했다. 
다들 사교성들은 끝내줬었던 모양이다. 
특히 공연포스터는 현찬의 아버님이 하시는 광고회사에서 찍어주었는데, 
무명 언더 그라운드 밴드에 어울리지 않는 "올 칼라"여서, 
적지 않은 충격이 예상되었다.(우리생각 에…)




2.


하지만, 이 포스터를 어떻게 해야 거리에 붙일것인가…
여기서 숙달된 조교(매우 숙달된) 신해철이 등장한다. 

1.그때 까지 표판돈으로 싸구려 봉고차를 빌린다.(봉고차 구할 돈 만큼도 표를 팔수 없다면 밴드 연습에 열중하기보다 그거나 연구하시오) 


2.남은 돈으로 플라스틱 바케스 하나, 밀가루 풀 열봉지, 오공뽄드 2통(돼지표도 괜찮음), 풀솔 2개, 고무장갑 1개, 타월 5개, 스카치테이프 10개를 준비한다.

3.봉고를 몰기 위해, 주위에 1종 면허가 있는 놈을 꼬신다 (미팅 주선해 줄게..등등..)

4.새벽 2시에 봉고를 몰고 나선다. 스카치 테이프로 포스터를 붙일수 있는 지역(잠시 밖에 안 붙어 있겠지만 왕래가 많은 곳, 혹은 카페로 들어가는 계단 옆등..)은 잽싸게 뛰어 내려서 붙이고 건물 주인이 보기전에 열라 튄다(이상의 행위를 '테이핑'이라고 함)

5.바케스안에 밀가루 풀과 뽄드를 7:3으로 배합한다. 그리고, 벽이 울퉁불퉁한 건물이나 주 요 공략 지역에 번개같이 '바른다'. 그리고 표면을 맨손으로 '문지른다'.

6.봉고를 타고 시린손을 호호분다.

7.또 내려서 바르고 튄다.

8.실외와 차안의 온도 차이때문에 손등에 묻은 풀과 뽄드가 갈라져 피가 나온다.

9.고무장갑을 끼고 해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효율 때문에 '씨팔'이라고 외치고 장갑을 버린다.

10.집에 와서 손등에 약바른다.

11.공연 당일, 기타치다 손에 피가 난다.

12.모른척하고 그냥 한다.(절대로 멋있는 표정을 유지한다.)


이상이 포스터 도배의 요령이 되겠다. 

아참, 13번이 빠졌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구청에서 불법 부착물 부착으로 연락이 오거들랑 군대 갔다고 한다.(절대 이게 중요하다. 겪고 보면 알테니 행방불명이예여..따위의 소리 하지 말고 절대 군대 갔다고 할 것!!)


건너뛰고… 당일날 무대 위에 엠프, 드럼세트 등을 열나게 나르고 있는데, 
드러머 현찬이 나타나질 않았다. 그는 공연 한 시간전에야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랬는데… 
'드러머'가 말이 지 '당일날'에 말이지…다리에 '기부스'를 하고 나타난거다. 
오토바이 사고라나…다행이 왼쪽발 이길래(오른쪽 발은 큰북치는 거다, 
왼쪽 발은 하이헤트라고 하는 위아래로 붙은 시벌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하이헤트를 완전히 열어 놓고 왼발은 쓰지 않기로 하고, 공연을 강행했다. 
나는 엠프를 나르다 허리를 삐어 매우 삐딱한 자세로 아픈 손등을 참아가며 노래를 했고, 맴버들의 선전덕분으로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레파토리는 5곡의 창작곡과 핑크플로이드, 에머슨레이크 앤 파머, 유라이어 힙, 스카이, 프로콜 할럼 등의 우리가 절대 소화할수 없는 곡들의 무한궤도 사이비 신난다 버전들이었다. 
관객은 무려 500여명, 그중에 99.9%가 친인척 및 친구들이라는 기록을 수립했다. 

결국 숙명여고 강당에서 치러진 무한궤도의 첫공연은 밴드의 창작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막대한 기력을 소모한 전맴버들의 탈진, 특히 해철이의 폐인 화를 낳았으며, 
무엇보다 이날의 관객동원력은 대학가요제 당일날의 엄청난 응원단 숫자로 결실을 보게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매우 민주적인 밴드였으며, 연습이 끝나면 맥주 반잔에 얼굴이 빨개져 집으로 귀가하는 귀여운 굳보이 밴드였다. 
당시 밴드계 풍토에서는 우리는 소수파였으며, 왜 밴드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후까시를 잡아야 하는지…
왜 인상을 벅벅그어야 하는지…공부잘하는 애들은 왜 밴드하면 안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3.



무대 위에서 몇번의 경험을 쌓고 나자 전맴버들은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표정에 '후까시'가 살벌하게 잡히기 시작한거다. 
무대위에서 절대 웃지 않으며 마치 나 공연 오천번 해바써..싸인도 좀 해줘써.. 
머 이런 표정 이었는데, 사실 공연이 끝나면 다른 팀 순서에서 대기실에 안있고 공연히 공연장 입구를 왔다갔다 하면서 싸인해달라는 사람 없나..돌아 다니다가 그날밤 연습실에서 쿠하하…난 싸인 세장 해줬다..웃기지마..바부팅이야~! 

난 다섯장 해줬다~!!! 하고 추태를 부리는게 당시 우리의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팀 한편에 어두운 그림자도 적지 않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설정한 방향, 간단하게 말해서 여러 프로그래시브 밴드들과 

팝이 겹치는 영역에서 우리가 활동할 공간은 오버에도 언더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레코드사 에게서는 꼴통 언더밴드 취급을 받았으며, 언더밴드들에게는 부르조아 학생밴드 취급을 받았고, 대학써클 밴드들에게는 잡탕 연합 서클 취급을 받았다. 

당시는 발라드가 국내를 완전 평정 할 때여서, 앨범 한장을 사면 발라드 9곡에 구색용 빠른 노래 한곡이 들어있는 시스템이었는데.. 

그렇게 가던가..아니면 말도 안되는 영어로 올메탈 판을 하나 만들고 

매우 비겁하게 보이는 우리말 발라드 (록빙가…'록' 발라드를 '빙'자한 완전'가'요)를 하나 싣던가…전자를 택하느냐..후자를 택하느냐…둘중에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선택에 따라 판을 오만장쯤 팔수 있는 꿈을 꾸던가..삼천장 팔고 만족하던가.. 

팔자가 정해지는 거였다..판 팔리는 장 수가 의미하는게 금전적인 수입이 아니라, 

활동영역이라고 볼 때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어디에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우린, 제 3의 선택을 해버린다..라면집에서 튀김 라면을 때리던 중 한놈이 

야..우리 대학가요제나 나가자..하고 말해버린 것이다. 

모두 비웃는 투로 크게 냐하하하~~~~하고 웃은 후, 다꽝을 때렸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전 맴버가 대학생이질 않은가..참가자격이 되는 거였다. 
사람들이 잘 이해 못하는 부분인데..우린 우리 스스로를 '대학생 밴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그 당시 언더 씬에 있던 수백개 밴드 중에 하나라고만 생각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팀만 전 맴버가 우연히 대학생이라는 것을 빌미로 하여 대학가요제라는 권모술수로 상황을 타개하기가 참으로 쪽팔렸다.. 

어떡하겠니…살 놈은 살아야지… 

1대 베이스 양두현이 음악해서 배고프게 살기 싫다고 일리노이 주립대로 떠나버리고, 
(사실 그놈이 떠난건 딴 이유이지만..핸들 잡은놈이 짱이니..이제 복수 할란다..) 
2대 베이스 조 형곤이 가입한지 얼마 안 되었을땐데 갑론을박을 거쳐서, 
원서 접수 마감날 조 형곤이 원서를 내고 왔다. 

웃긴 것은 절대 그런 웃기는 짜장 행사에 참가 할 수 없다던 강경파들도 마감 당일날엔 두 시간 늦었는데…원서 못 내는 거 아냐…어떡하지??? 했다는 거다. 
(애들은 애들이다.) 

원서 접수 번호를 보고 바짝 쫀 나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참가 곡을 쓰기 시작했다. 

접수 번호가 내 기억으로 1800번대 였던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룹 참가자와 솔로 참가자를 다 합친 숫자이긴 했는데, 일차 예선에 나가보니 밴드 팀도 100팀 남짓 되었다. 

당시 아버지의 검열을 피해서 기타를 뚱땅 거려야 했던 나는 "심야 작곡 셋트"를 갖고 있었는데..그게 뭐냐하면 기타 줄 사이에 스폰지를 끼어넣은 기타와 문방구에서 파는 멜로디언이었다. 

그걸 갖고 이불을 뒤집어 쓴 후, 이불 속에서 헉헉 대며 숨을 물아 쉬며 곡을 쓰는 거다. 

잠시 작업 하다 보면 이불 안에 습기가 차고, 머리가 어지러워 네 마디 이상을 연속으로 작업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아부지 한테 안 걸리고, 이것 저것 소리를 내 볼수 있는 것 만으로 대 만족이었는데, 우리가 상을 탄 후 무한 궤도는 심지어 자동 작곡 장치도 있으며 
그대에게는 코치들이 써 줬다더라..라는 얘기까지 들었으니…나…울까..웃을까.. 

무한궤도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 전에 고교떄 밴드 동료들이 만든 아기천사라는 팀의 긴급 요청으로 땜빵 맴버로 강변 가요제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노래가 '슬픈표정 하지 말아요'였다. 

라디오 중계에 나가는 본선 24팀 까지는 나가고 티비 중계에 나가는 12팀 결선에는 떨어졌는데, 솔직히 떨어진 이유를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수긍한다..) 

해서…나름대로 '가요제'라는 것을 분석해 보았는데,




4.



다음이 당시 나의 결론이다. 

1. 대학 가요제나 강변 가요제는 방송국의 자체 축제의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프로듀서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던 밴드는 입상권 (당시는 무조건 발라드)의 노래보다는 행사 구색용의 쿵짝 쿵짝을 해줘야 된다. 

2. 심사위원은 티비를 보면서 채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관객과 같이 있다. 그러므로, 관객들의 반응을 잡아내는 것이 결과 적으로 심사위원들에게 어필하는 지름길이며, 가장 정당한 방법이다. 

3. 기성 곡이 아니라 신곡을, 다시 말해서 듣도 보도 못한 곡을 현장 관객, 심사 위원, 티비 관객 이 평생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번 들어보니 좋은 곡' 따위는 먹힐 이유가 없다. '한방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4. 어떤 노래든 1절쯤 들어보면 답이 나온다. 2절은 어차피 1절의 반복이다. 그렇다 해도 ' 예의상' 1절 2절의 반복구조는 있어야 된다. 
그렇다면??…인트로와 아웃트로를 나 들어 왔어요.. 저 끝났어요…라는 식으로 쓰는게 아니라, 곡의 이미지를 전달 하는 독립곡으로 간주하고 화려하게 발리는 거다. 특히, 일회성의 행사를 눈 지긋이 감고 두시간동안 인내심있게 아마추어들의 장기자랑을 들어줄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작 하는 순간 튀어야 하는 거다. 

5. 코드와 리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패턴으로… 단지 어레인지 먼트를 국내 밴드 족보나 가요 족보에 전혀 없는 팝 록 밴드 풍으로 복잡하게 벌린다. 

6. 이상의 아이디어를 수줍은 아마추어처럼 연주 하면서 동정표를 따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고, 무엇보다 우리체질에 맞지 않는다. 노련한 표정으로 노래가 삑사리가 나도 눈에 힘을주며, 박자가 가도 태연해야 한다.('태연' 보다 '의연'이 어울리겠다.)

7.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잔대가리 수준을 넘어 거의 야비 수준에 이르는데…하는수 없다. 이 게 리더의 역할이다. 대학 가요제에서 초창기 구도는 대상-그룹 금상-듀엣에서 대상-듀엣 혹은 솔로 금상-밴드의 구도 였다가, 중기 이후는 대상, 금상-아무나 동상-참가 밴드중 제일 난 놈 이라는 구도로 정착되었다. 고로, 일단 라이벌 밴드들을 모두 격파한 후 최소 금상을 탈환해 온다.(회의 할 때 최소 금상 이라고 얘기 했다가 애들이 무지 구박했다. 꿈 깨고 동상 이라도 건지자고…대상 소리 꺼낸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여기 까지 굴린 후 인트로서부터 후주까지 10분쯤 걸려서 이불 속에서 헉헉 대며 곡을 썼다. 이리하여, 88년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공연에서 우려 먹고 있는 "그대에게"가 탄생했다. 사람들이 공연장에서 이 노래의 인트로가 나오는 순간 까무라치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난 아직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어쩄든, 졸라 좋아해주니 고맙긴 고맙다…. 

벼락치기 연습과 마구리 가사 쓰기로 1차 예선에 나가보니, 정말 장관이었다. 정동 MBC에 모여 있는 '그룹사운드'들은 당시 우리나라 밴드들의 종류별 콜렉션 같았다. 
주력인 대학 서클들 외에도 당시 사람들이 경악하는 패션-울트라 장발, 가죽잠바,가죽팔찌(쇠찡 박힌…), 카우보이 부츠-로 무장한 메탈 밴드도 있었고, 자주색 기지바지(당연히 배바지), 깃또 와이셔츠, 도끼빗, 닭대가리 파마의 펑크풍 밴드도 있었으며, 서울대에서 왔다는 괴상한 3인조는 째즈도 아닌 가요도 아닌 골 때리는 곡을 연주했는데 밴드 이름이 실험실이었으며, 바벨2세 에 나오는 요미와 흡사한 키보디스트가 피아노 연주로 관객들을 으악 죽이고 있었다.(그의 이름은 정석원 이었다..훗날 그의 별명은 요미가 된다…)

밴드들은 서로 살벌한 시선을 교환하며 한팀 한팀 연주를 했고 우린 사실 별로 긴장하진 않았다. 수천명의 관객이 모이는 진짜 공연에서 무려 '오프닝 밴드'씩이나 해본 것은 우리 밖에 없을거야..라고 생각한거다. 게다가 우린, 뺑이 치고 단독 공연도 했었으니까…무대 경험이 그렇게 중요 한지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인상 깊었던 출전자 들로는 강강수월래를 부른 밴드가 있었는데, 보컬 리스트가 '널뛰기' 모션을 하며 안무까지 곁들인 초강력 팀이어따…(무려 3차예선까지 올라왔었다.) 완전 뽕짝을 연주한 팀도 있었는데 음악이 문제가 아니라 얼굴이 완전 40대여서 출전자들이 "여기 대학가요제 마자여??" 하고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1절이나마 끝까지 연주한 팀은 우리를 포함 2-3팀에 불과했고, 심한 경우에는 네마디 만에 땡 하고 벨이 울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특히, 반 사회적인 아웃룩을 하고 있을 경우에는 두마디 만에 벨이 울리기도… 

연주를 시작할때는 학교 이름, 팀 이름, 곡 제목을 싱어가 소개하고 연주를 시작하는데 "서울대, 연대, 서강대 연합 무한궤도 입니다.." 하는 순간 관객석이 웅성웅성 하는게 아닌가.. 졸라 쪽 팔렸다. 점수 좀 높은 학교 다니는게 도대체 음악하고 무슨 상관인지..그렇다고 학교 이름은 밝힐 수 없구여…하는 수도 없어서 2차 예선서 부터는 "서강대, 연대, 서울대…" 순으로 얘기 했다.(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쓴 웃음이 나는 기억이다. 어른들이 명문대..명문대 하는 이유가 있긴 있구나…하지만 왜 음악 필드에 까지…
3차 예선을 통과 하자, 팀 분위기가 골때리게 되어버렸다. 당시 우리는 1,2,3차 예선을 우리가 모두 1등으로 통과 했을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근거로 목표를 동상에서 은상으로 대거 수정 하는 등..들뜨기 시작 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중고생 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수입을 얻고 있었는데(말하자면, 불법과외) 아무리 열심히 모아도 쌤플링 키보드를 살 돈은 턱 없이 모자랐다. 
우리 아버지의 10남매나 되는 친척 중 유일하게 약간의 한량 기질이 있다고 인정되는 작은 아버지에게 고민 상담차 머리칼 나고 처음으로 찾아 갔는데, 의외로 흔쾌히 턱이 빠질 정도의 거금인 당시 돈 100만원을 마련해 주셨다. 
이게 내 평생 음악하면서 내 힘 아닌 다른 사람의 돈을 받은 유일한 케이스다.(아직도 안 갚았다.) 해서, 조현문이 갖고 있는 주노60과 디엑스 7(친척집에 있던 것을 어찌 어찌 하여 장기 임대라는 명목으로 쎄벼왔다.) 김재홍이 갖고 있던 롤랜드 디50 (대학 들어가면 키보드 사 주실거죠?? 라고 중1떄부터 졸랐다고 한다.) 에다가 내 아카이 엑스7000이 합쳐져 스테이지 위에는 무려 4대의 키보드가 올라가게 되었다. 

물론 당일날 출전하는 다른 밴드들도 우리와 같은 등급의 악기를 사용했지만, 그건 당일 날 악기 사에서 대여한 것 이고 우리는 우리소유의 키보드가 있었기 때문에 차이는 활용도에서 나는 것이었다. 
모든 키보드는 스플리트 모드로 왼손 오른손이 다른 소리를 내도록 셋업되어 있었고, 내 키보드에서는 동시에 5개의 틀린 소리를 지원하도록 설정해 놓았다. 
우승 후에 무한궤도는 억대의 장비를 쓴다는 소리가 나돌았는데 억대는 아니고 그저 몇 백만원급의 '두뇌'를 사용했다. (음악하는 놈 중에 장비 탓 하는 놈 치고 발로 뛰면서 장비 구하려고 뺑이 치는 놈은 여지껏 못 봤다. 다른 놈이 갖고 있는 장비는 모두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아나보다.) 

결선에 진출하게 되자, 우리는 담당 프로듀서에게 따로 불려가 밀실에서 잠시 대화를 가졌다. 이 사건은 출전자들이 약간의 의심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게 되는 원인이 되었는데, 내용인 즉슨 그 전해, 말하자면 87년에 6.29선언 이후 대학가요제가 열리게 되자 결선 참가자들이 단합하여 합동 뮤지컬 공연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 보복으로 MBC는 행사 자체를 축소하여 버렸는데, 올해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경우 그 주모자는 틀림없이 무한궤도 일 것이라고 지목 되어, 쉽게 말해 개기면 너네 죽어~! 라는 다짐을 받고 나왔던 것이다. 

사실 궤도 맴버중 짱돌이라도 한 번 던졌던 사람은 나 밖에 없었는데, 다시 강조 하자면 리더인 책임 때문에 나….엄청 착한 표정 하고 있었다..(그런 착한 표정하지 말아요~~~ㅠ.ㅠ) 

여담이지만 이승철 선배도 강변 가요제에 나갔었는데, 밀실로 불려가 너 대가리 털만 깎고 오면 생각 좀 해보겠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울트라 양아치 장발을 범생이 머리로 자르고 갔더니… 그래도 떨어뜨리더래..

운명의 12월24일, 대학가요제가 사상 최초로 잠실 체조 경기장에서 열리던 그해…그해 겨울은 졸라 추웠다. 왜냐믄, 방송에 나갈 인서트 화면을 찍는다고 눈밭에서 굴리질 않나..썩은 미소 띄우며 나뭇가지 붙들고 재롱을 떨라고 하질 않나..사실 우리는 첫 공연 이후에 틴에이저 잡지에 취재 요청 엽서가 많이 와서 인터뷰를 몇번 해 봤는데, 

인간 피라미드 쌓기, 풀밭 뒹굴며 화사하게 웃기 등을 요구 하는 바람에 골 때렸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급기야 12월23일 밤, 맴버 전원이 고열과 복통, 설사,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눈 앞이 캄캄 했는데 그래도 다행인건, 씨파..나 안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같이 손잡고 울면서 우짜 됐던동 show must go on이다 하고 다짐을 하였던 것이다.




5.


당일 날 리허설, 나는 MBC엔지니어들이 포진한 콘솔로 가서 내가 원하는 사운드를 좌~악 브리핑한 후 몇 개의 페이더를 내 맘대로 조정해 놓고 휭하니 밴드 스테이지로 돌아왔는데, 건방지다고 갈굼 살벌하게 당했다. 

당시 무대 배치는 체육관 센터에 거대한 메인 스테이지가 있고 그 한가운데에서 솔로 가수들이 고목나무에 붙은 모기 폼으로 노래를 하고, 밴드 스테이지는 메인 스테이지의 20분의 1사이즈로 한 쪽에 찌그러져 있었는데 드럼 셋트와 엠프 사이에서 설 자리를 찾아 헤매야 했다. 

게다가, 솔로들의 마이크는 듣도 보도 못한 고급품인데 비해 밴드 싱어의 마이크는 이럴 수가…3만원짜리 오디오 테크니카가 아닌가…(지금 가정용 오디오 마이크가 그거보단 낫다.) 한술 더 떠, 무대위에 모니터 시스템이 용량이 너무 적어 우리가 연주하는 소리보다 체육관벽에 부딪쳐서 돌아오는 소리가 더 큰 거였다. 

몸살은 났지, 배에 힘은 없지, 목은 쉬었지, 빽빽 소리 지르고 노래 해봐야 내 목소린 하나도 안 들리지… 정말 최악의 스테이지였던 것 같다. 당시 무한궤도 보고 스테이지 매너가 너무 노련해서 아마추어 같지가 않다 라는 평들이 있었는데, 아마 몸살 안 난 상태에서 우리를 메인 스테이지위에 올려 놓았으면, 좌로 뛰고 우로 뛰고 완죤히 지랄이 났을 거다. 

사회는 이택림, 김은주 였고 (당시 나는 김은주 아나운서를 보고 뿅 가서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엔트리 1번 부터 대학가요제가 진행 되었다. 우리는 엔트리 16번..꼴번 이었는데 우리는 속으로 불만이 대단했다. 

우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참가자가 발라드 넘버여서 우리 순서까지 관객이 집중력이 유지 될 거라고 도저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무대는 한 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지, 참가 번호는 꼴번이지, 정말 찬 밥 한번 제대로 먹어 본다고 생각했다. 

15번이 노래를 하는 동안 우리가 밴드 스테이지에 올라가 준비를 시작했다. 체조 경기장에 꽉 찬 관객들의 소리와 무대 스피커의 굉음 사이에서 혼이 반쯤 빠져 악기들의 전원을 넣었는데 내 재산 목록 1호 쌤플링 키보드에서 bad data disk…하는 사인이 뜨는것이 아닌가… 

전에도 한두 번 겪은 적이 있는 일로 당시 쌤플리 키보드는 로딩 시간이 너무 길어 엑스 7000은 퀵 디스크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빠른 대신 디스크가 불안정 하여 내용이 자주 손상되는 것이었다. 

빽업 디스크를 미리 준비 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전 날 너무 탈진해 잠들어 버린 것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거다. 손상된 디스크가 다시 돌아올 리 없건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로딩을 되풀이 하는 동안 15번의 노래는 거의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밴드의 음악적 리더와 스테이지 리더는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데, 당시 나는 음악적 리더 보다는 오히려 스테이지 리더에 가까웠다. 

당시로서는 복잡한 편이었던 무한궤도의 셋업을 3분내로 해치워야 하는데 사고가 해결이 되질 않으니 모든 준비를 맴버들에게 일임해 버리고 나는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는 속담처럼 작살 난 디스크를 만지고 있었던 거다. 

여기서 해철이의 비겁함이 나온다. 
성당에 안 나간지 몇 년이나 되었건만, 나는 그 와중에 번개 같이 (정말 빠른 속도로) 주기도문, 성모송, 사도신경을 암송한 뒤 30년 내로 성당 하나 지어드리죠…라는 아부성 멘트를 날리고 키보드를 있는 힘껏 움켜잡은 뒤 온 정신을 집중 하여 디스크를 넣었다. 

내 평생 어떤 일에 그렇게 강렬하게 집중해 본 적은 지금껏 없었을 것이다… 
loading…이라는 사인이 보이고…사운드가 입력 되었다. 

나는 살아있는 주 예수의 증거를 드디어 보는 구나..하고 감격했지만, 감격할 시간이 없어서 맴버들에게 다시 침착하게 돌아온 내 표정을 확실하게 보여준 후 (서로의 표정을 확인한 것은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일중 하나다.) 밴드 스테이지로 올라온 김은주 아나운서를 맞았다. 




6.


몇 마디의 인터뷰 후…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관객들은 지쳐 있었지만, 체육관 전체는 완전히 우리 것이 되었다. 

200명쯤으로 추산되는 우리 친구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바람을 잡았고 첫 공연 이후 결성되어 있었던 수십 명의 소녀 팬클럽도 가세했으며, 또한 운이 엄청 따랐던 게 당일 날 체육관에는 88올림픽 때 사용했던 조명 시스템이 아직 렌탈 기간이 남아 있어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15명의 발라드 엔트리 들이 노래를 하는 동안 심심해서 하품을 하고 있던 조명 기사가 옳다 꾸나~~전부 돌려 부러~~ 로 모든 조명 시스템을 풀로 올려 버린 거다. 

마치, 이 행사의 메인 밴드이자 엔딩 인 듯 한 분위기가 자동빵으로 연출되었음을 나중에 화면을 보고 알았다.

(후일담인데 당시의 심사위원장은 조용필 전하였다. 게다가, 쟁쟁한 프로듀서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이 양반들이 모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출신이었던 거다. 

조용필 사단으로 도배된 심사위원석에서 전하께옵서는 거의 꾸벅꾸벅 조시다가 그대에게의 인트로를 알람시계로 착각, 깨어났는데 나중에 보니 기억나는 게 우리밖에 없더라는 거다. 

채점지를 걷는 순간, S모 편곡자 왈, 형..어떡하지?? 

전하 왈, 야..우리가 보컬인데…보컬 줘라..보컬…

L모 편곡자 왈, 그래..그래..그 새끼들이 좀 시원 했어… 

이리하여, 강력한 대상 후보 주병선을 정말 간발의 차이로 돌리고 대상이 우리에게…하늘에서 떨어졌다.)

후주가 끝나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기석으로 돌아가는데 관객석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체육관 바닥 쪽으로 넘어 들어오며 사인을 받는다..사진을 찍는다..소동을 부렸고 경비원과 경찰들이 우리 쪽으로 뛰어 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예전에 한번 겪은 일을 다시 재현하는 듯 한 확실한 기분으로 대상이로구나…해냈다…라는 것이었다. 

강변 가요제 출전 당시 이상은이 대상을 타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는데 결선까지는 거의 구색용 노래의 분위기였던 것이 당일 날 관객들이 열광하고 이상은에게 소녀들이 몰려들어 난리를 치자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이상우가 금상으로 떨어지고 이상은이 냉큼 대상을 집어가는 것이 아닌가. 

기석에 앉아서 은상을 발표할 때까지 우리 이름이 불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떨어지던가, 대상이던가 둘 중의 하나인 분위기였던 거다. 

대상 무한궤도라는 이택림씨의 외침 순간 껑충껑충 뛰었던 사람은 내가 아니고 베이스 조형곤이다. 

머리 스타일과 복장이 거의 유사해 그게 나였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매우 거만하게 터벅터벅 무대위로 밴드의 맨 뒤에 서서 의당 받을 걸 받는 다는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대학가요제의 대상쯤으로 내 기뻐하는 얼굴을 남에게 보일 순 없다는 엄청난 교만감도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대학 가요제는 끝이 났고 기뻐할 힘도 없이 완전히 지친 우리는 체육관 밖에서 서로를 황당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다가…내일 보자…하고는 해산했다.

전원 귀가 후 시체처럼 잠들었는데, 아침에 현찬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일이 꿈이 아니고 사실인 게 맞냐는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우리는 서로 볼을 꼬집으며 지냈다. 

대학가요제 에피소드의 엔딩은 이렇다. 

난 트로피를 들고 집으로 귀가했다.

집은 온통 불이 꺼져 있었고, 초상집 분위기였다.

아부지 왈, "……우짜면 좋노…" 

어머니 왈, "그러게요…(침울)…대상씩이나 타버렸으니…"
"이제는 더더욱 말려지지도 않을 테고…

두 분은 인생 만사 새옹지마라고 내가 상을 탄 것이 내 인생 말아먹을 흉사의 조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삐거덕~) 저..왔어요.."그래…""저..대상 탔어요.."

"그래… 티비 봤다…(마지못해) 수고 했더구나…자라…"

"…네…" 

이것이 88년 MBC대학 가요제 대상 수상 및 대학가요제 1회 이래 십수 년만의 밴드 그랑프리 탈환에 대한 울 엄마 아빠의 공식반응이다. 

젠장…다른 집은 엄마 아빠가 이쁘다고 뽀뽀도 해주고 맛있는 것도 사줬단다.…젠장…. 




7.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보내고 멤버들은 현찬의 집 지하실에 다시 모였다. 

전원 탈진에다 쾡하니 맛이 간 얼굴, 꿈인지 현실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골 때리는 상태에서 우린 그냥 얼굴을 마주 보며 낄낄 댔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회의에서 팀의 방향은 이제 명확히 결정되었다. 

원래는, 대학가요제를 마지막으로 나를 제외한 멤버들은 음악을 그만두기로 했던 것인데, 언감생심이라고 그랑프리를 탄 이상 아마도 앨범을 제작하는데 무리 없는 상황이 될 것이고, 최소한 밴드를 만든 이상 앨범을 하나 남겨야 하지 않겠냐..하는 것이 중론이었다. 

나 역시 고생고생 해온 멤버들과 어떻게든 레코드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대학 가요제 보다 우선하는 목표였고 당연히 뛸 듯이 기뻤다. 

자신들의 인생에서 프로페셔널로 또 전업 작가로의 길을 배제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밴드인 이상 언젠가는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라는 것이 당연히 피할 수 없는 길이기는 하지만, 언제 뛰어들어도 뛰어들어야 할 그 삭막한 쇼 비즈니스의 세계보다는 그저 즐거운 친구들과 같이 밴드를 하는 것이 당시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자 즐거움 이었다. 

레코드사를 선정하고 매니저를 선택하는 일은 리더인 나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 ‘쇼 비즈니스’ 개시 하루 만에 상황은 우리의 상상과 백팔십도 틀림이 밝혀졌다. 
대학 가요제 출전당시 우리를 목격하고 제작자가 되어 주겠다..라는 의사를 밝힌 사람은 무려 삼사십 군데가 넘었다. 

그들은 어찌 어찌하여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기도 하고, 방송국 프로듀서를 통해서 연락을 해오기도 했는데 커피숍 같은 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진행 상황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 호텔 커피숍(그들이 지정한, 나로서는 평생 처음 가보는,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는 한복을 입은 아줌마와 정장을 차려 입은 남녀들이 맞선을 보고 있는 괴상한 장소)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뛸 듯이 반겨 맞으며 십 년 된 지기인양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대게 첫마디가 “저런…스타가 버스를…안 될 말이지. 너 차가 있어야겠구나.…. 

네가 좋아하는 기종이 뭐니?” 뭐 이런 허파에 바람 넣기 성 멘트다. 

물론 나야 뭐 기타니 신디사이저니 이런 물건들을 들고 버스 운전사 양반들의 온갖 박해와 박대를 받으며 다닌 지 오래 이니 솔직히 말해서 귀가 솔깃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라고 불어야 겠다. 

그르나…그르나 말이쥐 다음 멘트로 넘어가면 그야말로 확 깬다. 

“C피디한테 얘기 들었는데…너 솔로 할 거라면서…P씨도 그렇게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눈을 꿈벅 꿈벅 하면서 이게 웬 문지방에 좆 낑 기는 소리인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아뇨오오오~~~ 전 밴드 할 건데요오오오~~~” 하고 대답하면, 그래 더 필요한 악기는 없니, 음악 방향은 어디로 갈거니, 밤무대가 수입이 살벌한 건 알고 있지, 

내가 CF계에 아는 사람이 오방 많아..하고 날라 다니던 그 많은 멘트들이 전부 쏘옥 들어가고 침묵만이 흐른다. 
그리고는 설득의 멘트가 몇 개 더 나오는데 종류별로 나열하자면, 첫째는 너는 아직 뭘 몰라 형 둘째는 나도 예전에 그거 해 봤는데 그거 답 안 나와 형 셋째는 언제 보따리 싸도 쌀 건데 미련 버려 형 등등등... 

대학 가요제 출전 당시에도 그렇고 레코드사를 찾아 헤매던 당시에도, 내가 넥스트를 만들던 무렵에도, 그리고 현재 까지도 밴드가 찬밥을 먹는 것은 민간인의 상상을 초월 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내가 솔로 싱어로 나설 거라는 것을 전제로 계약서를 들이밀었고 나로서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속으로 곧 니 놈들은 땅을 치게 될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는 수밖에. 

완강하게 몇 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 그들은 곧 참, 선약이 있는데 잊어버렸네.…혹은 오 그래 그러면 내가 검토해보고 다시 전화하지…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지며, 나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8.


대학가요제가 끝나고 한 달간은 골 때리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주관 방송사인 MBC의 티비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몇 개 출현 했으며, 특히 잡지사 등에는 우리와의 취재를 요청하는 엽서가 쇄도해 상당히 많은 분량의 인터뷰를 소화해 내야 했다.

그것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은 재미도 없지 않았으나, 곧 짜증과 염증으로 바뀌었고 여전히 제작자들은 솔로 싱어라는 형태 이외에는 전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는 첫 앨범을 세상에 내 놓지 못한 채, 그저 대학 가요제의 우승자로 매스컴에 잠깐 얼굴을 비추고 그것을 추억이랍시고 회상해야 될 처지가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첫 라디오 출현을 했던 프로그램의 프로듀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흘쯤 뒤일 것이다.)

디제이를 교체해야겠는데, 혹시 디제이 할 생각 있냐는 거다.

나는 친구들과 전화를 한 통씩 때려 본 후 바로 예스 해 버렸다.

첫째는 공동 진행자가 미스 코리아 장윤정이고 둘째는 디제이는 내가 밴드 다음으로 좋아하는 일이었으며 셋째는 레코드 계약이 개판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탈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감 등등이었다.

프로그램 이름이 “하나 둘 셋 우리는 하이틴” 이라는 게 유일한 걸림돌이요, 하기 싫은 요인 이었지만…

지지 부진하게 몇 달을 끄는 동안 오랜만에 방송국에 행차한 조용필 선배가 라디오 국으로 사람을 보내 나를 찾았다.

자신이 심사위원장으로서 뽑은 꼬마 녀석을 얼굴이나 한번 보려는 거였는데, 매니저도 없이 빌빌대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예전 매니저였던 유 재학 씨를 추천해 주었다.

그는 나도 이름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전설의 매니저 등급 중 한 사람으로 조용필의 매니저라는 이미지로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었다.

유재학씨는 다른 매니저들과는 달리 밴드를 유지 하며 첫 앨범을 내겠다는 계획에 어떠한 반대도 표시 하지 않았다.

단지, 밴드가 해산 할 경우 계약 기간의 나머지를 내가 솔로로 이행해야 하며 그 기간은 5년임을 내세웠는데, 멤버들 사이에 논란의 소지가 될 부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당시의 음악 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그나마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그리고 불과 얼마 후, 우리는 첫 앨범의 녹음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나의 미래는 장미 빛이었다. 밴드랍시고 계속 까불다가는 얼마 안되어 좆 될 거라는 주위 경고는 귓등으로 넘겨 버렸고, 밴드 멤버들은 첫 레코딩으로 인해 모두 익사이팅 했으며, 나는 라디오 디제이 수입으로 사십 팔개월 할부 소형차를 하나 사고 면허를 땄다.
(그리고 삼 개월 내로 앞 범퍼, 뒷 범퍼, 앞 문짝 두개, 뒷 문짝 한 개, 풀랜더 두개를 각각 다른 접촉 사고로 바꾸었다. 그래도 어쨌든 난 행복했다.)

소속사와 제작자의 문제는 해결했고 또 한 가지 문제는 팀 전력의 강화 문제였는데, 우리는 트윈 키보드 시스템으로도 모자라 한명의 키보디스트를 더 영입하여 무려 세 명의 키보디스트가 있는 밴드로 방향을 정하고 인선 작업에 들어갔다.
세 명의 키보드라는 골 때리는 시스템에 대해 반대 의견도 없지 않았으나 누군가가 “레너드 스키너드는 쓰리기타로도 하던데…” 라고 말함으로서 회의가 끝나버렸다.

제 삼의 키보디스트…그가 정석원이다.

이번에는 호텔 커피숍이 아니고 그냥 다방이었다.

(당연하지) 그는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 유학을 와 있는 셈이었으므로,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자취방은 나에게도 또한 아지트가 되었다.

그가 합류함으로서 무한궤도에 대중적인 성격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는 우리나이 또래에서 드물게 코드 변환, 전조, 텐션 변화에서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배킹형 키보디스트로, 견고한 팀플레이에 주력하는 현문이나 리드 플레이를 주로 맡는 재홍과는 완전히 다른 타입의 키보디스트였다.

게다가 당시 그의 캐릭터는 사투리가 섞인 코믹 캐릭터로 훗날의 공일 오비 때와는 사뭇 이미지가 다르며, 밴드가 해산할 때까지는 멤버들과도 매우 잘 융합했다.

자, 이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녹음에 들어간 무한궤도의 첫 앨범, 우리는 과연 무슨 짓을 했던가…

그 참상을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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