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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Oct
음악에세이 과연 우리의 것이란 무엇인가?작성자: anonymous 조회 수: 2562
열번째 이야기-과연 우리의 것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대중 음악이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언제나 결과만을 수용하며 국산품으로 위장한 일본 노래를 폭포수처럼 쏟아 붙게 하며 국악에 대한 인식 교육에 소홀하며 우리의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우리이다. 자 이젠 우리의 것을 만들어야겠다. 무조건 '남의 것'이라면 평가 절하하는 못된 버릇을 고쳐야 할 것이며 표절을 근절하고 인위적 통제와 심의를 철폐해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 속의 우리 음악으로 가꿔 보자.(편집자 주)
존경하는 기성세대 분들께선 이런 말씀을 하실 때가 있다. '외래문화에 물든 청소년의 걱정스런 모습...운운' 그들이 이야기하는 외래 문화에 물든 대표적인 모습이란 아마도 눈에 거슬리는 젊은 층의 패션과 외국의, 혹은 외국의 영향을 받은 대중 음악을 즐기는 모습이겠고, 그 외에 전자 오락, 만화 등도 큰 걱정거리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맹목적으로 모방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TV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옷차림에 제재를 가하고 무국적의 대중음악을 추방해야 한다는 등 목소리를 높인다. 먼저 패션 이야기를 잠깐 하고 본론인 대중 음악 이야기로 들어가자. 외래 문화에 물들지 않은 건전한 옷차림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국적 있는'옷차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필자의 결론은 지금 당장 전 국민에게 한복 이외의 복장을 금지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거나 택일 하라는 것이다. 민족 고유의 전통 복장이 아직 주종을 이루는 아프리카 일부 국가도 아닌데 청소년의 복장에 도덕성 등의 개념을 들먹이는 것은 넌센스다. 공권력이 제한할 수 있는 부분은 '과다 노출'정도 밖엔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그 '과다'에 대한 기준은 많이 틀리겠지.) 기성세대가 신세대의 패션 감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급속도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신세대가 기성세대를 안심시킬 정도의 안전한 패션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큰 문제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사회의 '정체성'이며 변화가 없는 죽은 사회는 멸망을 예고할 뿐이다.
외래 문화에 물든 청소년 운운, 말도 안되는 소리
흔히 '왜색'의 복장이니 뭐니 하는데, 기모노를 입고 나다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용어도 무의미하다. 용어의 개념조차 명확히 하지 못하고 마구 써 댄다고 애국은 아니다. 가장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가와 문화접변이 활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신체조건이 틀린 서양인들의 복식을 흉내내는 것보다 이미 한 번 개량된 후 잡지 등을 통해 전달되는 일본 청소년들의 복장이 더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청소년들은 '일본에서 온 유행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릴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 뿐이다. 이런 점은 서양 대중음악 -일본 팝- 국내 대중 음악의 구도와도 유사하다. 빌보드에서 히트한 곡이 무조건 우리 나라에서 히트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젠 우리에게 맞지 않으면 외면한다. 오히려 대중은 귀가 트이고 냉철해 지고 있다. 일본 대중 음악도 같은 동양인으로서의 공통분모에 어울리는 면이 있기 때문에 듣는 것이지 '일본 노래이기 때문에' 듣는 이가 다수는 아니다. 명절날 길에 나가보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줄어 들고 있다. 오히려 무국적의 짬뽕 문화인 듯 보이는 일본에서 명절에 전통복식을 하는 사람이 많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이런 것이 아닐까. 오히려 '왜색'의 위험성은 기성세대에서 발견된다. 애써 숨기려 하지 말자. 해방 이후 친일파들은 미 군정에 빌붙건 어쩌건 살아 남았으며 몰락하지도 처벌받지도 않았다. 수 많은 독립 투사들의 희생이 무색하게도 아직도 술 한잔 걸치면 일제의 군가를 부르는 정신나간 노친네들이 남아 있음은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아직도 그 뿌리에 대한 논쟁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트로트에 소위 전통가요라는 매국행위가 될지도 모르는 이름을 붙었던 것은 또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 지면에서 그 논쟁의 결론을 주장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제 50년, 그간 일말의 연구나 성의도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쉽게 감히 전통가요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그 대담함이 두렵고
슬프다. 다시 패션 이야기로 돌아가서, 청소년들의 맹목적인 모방 운운 이야기는 기성세대가 청소년들의 문화적 취향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며, 또 자신의 아들 딸들을 얼마나 얕잡아 보고 있는가에 대한 단적인 증거랄 수 있다. 최근의 조사는 사람들이 '보고 즐기는 것'과 '자신도 해보고 싶은 것'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패션은 여전히 연예인들이 유행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결과로 알려 주었지만 그것은 눈쌀을 찌푸릴 만한 요소도 없고 실용적인 것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레게 파마를 하고 나왔을 때, 방송국은 제동을 걸었고 기성세대는 아우성쳤다. 그러나 그들이 레게 파마를 계속하고 TV에 나왔던 들, 등에 멘 가방만큼이나 유행되었을 것인가. 그들은 기성세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보면 될 일이지 굳이 청소년 프로그램을 기를 쓰고 본 후에 모방 위험 운운하고 '말려라', '못나오게 해라'하는 건 체통 없어 보인다. 패션 부분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도대체가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며 세계적인 기준으로 볼 때 지극히 '평온한'축에 든다는 것, 기성 세대의 열성적인 노력 결과 TV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복장은 회사원 복장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필자는 이를 신기해 하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 사람들은 원래 점잖아서 그렇다'라고 설명한다는 것, 또 보지 않을 권리는 채널을 돌림으로써 행사할 수 있지만 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외래의 영향'을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국주의 시대로 시간을 돌려서 서양 열강을 격파하고 식민지화한 후, 그들에게 상투와 댕기 머리에 관한 포고령을 내리고 저고리의 우월성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우리의'음악을 만들기 위한 '우리'란 과연 누구인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렇게도 이야기하는 '우리의' 대중 음악 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느낌이 있으면서 서양 음악인, 그러면서 또한....그만두자. 도대체가 세모난 네모를 그리라거나 네모난 동그라미를 그리라는 이야기다. 매스컴을 통해 어줍지 않은 사이비 애국의 논조를 띠고 목청을 높이는 글을 보면 도대체 자신이 뭘 주장하는지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 <서편제>가 영화가를 휩쓸 무렵엔 더더욱 그랬는데, 대중 음악을 만드는 당사자들에겐 어떠한 자문 요청도 지원도 없었고 신문지상엔 비전문가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만 가득했드랬다. 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자병법을 도입하여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문장을 떠올리자. '우리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우리'란 누구인지 먼저 생각해 보자.
1. 미8군을 중심으로 국내에 팝이 들어온 이래로 늘 우리는 영/미를 중심으로 한 서양음악의 일방적 수요자요 변방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장르건 그 '원인'보다 '결과'만을 수용한다. 즉 블루스를 모체로 한 하드 록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며 왜 펑크가 얼터너티브의 이름 아래 부활하는지 그 사회적 문화적 배경은 고사하고 음악적 공통점도 모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이 분명한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이동하면 우리는 허겁지겁 결과만을 받아들여 흉내내기 힘든 기술은 과감히 포기하고,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배경은 - 가령 랩 뮤직 저변의 흑인들의 저항이나 아메리칸 드림이 붕괴된 후 노동자층의 분노와 좌절이 담긴 얼터너티브 등- 히트하기 편한 사랑타령으로 바꾸어 마치 몇 번이나 복사하는 동안 소리가 뿌옇게 된 카세트처럼 희멀건 작품을 생산해 낸다.
2. 문화란 국경이 없고 통제도 힘들다. 크레믈린의 철권통치도 러시아의 젊은이들이 비틀즈를 듣고 청바지를 갖고 싶어하는 욕구를 막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본 문화 개방을 하건 말건 그건 자기들의 탁상공론이고 이미 젊은이들은 일본 대중 음악을 손쉬운 경로로 정당한 경로 보다 매우 싼 가격에도- 즐긴다. 비유가 맞을진 모르겠으나 이미 애 셋 낳고 살고 있는 자식들을 결혼을 하락하느니 마느니 노인네들끼리 싸워봐야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문화를 무역처럼 통제 할 수 있는 것으로 관료들이 착각의 극을 달리는 동안 '표면적으로는' 일본 대중음악의 유입이 금지되어 있는 현실을 이용, 대량의 표절곡이 쏟아져 나오고 대중은 이를 알면서 용인하는 현실에 이르고 최근에 최 모라는 발라드 가수는 앨범의 첫 곡부터 끝 곡까지 최근 몇 년간 일본에서 가장 히트한 노래만 모아 반주까지 똑같이 만든 쓰레기를 내놓고 꽤 많이 팔아먹었다. 표절은 창작이 아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듯 뭘 만들어야 그게 우리 것이니 아니니 이야기라도 할 게 아닌가. 역설적으로 우리 문화의 자생력을 확보한다는 명분아래 일본 대중 음악의 유입을 막는 것은 국산품으로 위장한 일본 노래를 한국시장에 폭포수처럼 쏟아 붓게 하고 있다.
3. 현재의 젊은 세대는 '우리의 것'을 만들 기회를 철저히 박탈당한 채 성장했다. 필자가 어릴 때는 그나마 TV에 국악 프로그램이 몇 개 있었는데, 가야금 소리라도 띵 하고 나오면 '으그그 저게 뭐야'하고 채널을 드르륵 (그당시는 채널을 버튼으로 노르지 않았음) 돌려 버렸고 그래서 부끄럽게도 국악을 대하는 시각은 외국인의 그것보다도 못하다. (최소한 외국인들은 신기해 하기라도 한다. ) 피아노 레슨이라도 다니면 동네 아이들 부러움이라도 샀지만 '나 퉁소 불어'하면 이상한 녀석 되는 풍토가 아니었던가. 최근에야 느끼는 것은 국악은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과 TV나 CD에서 느끼는 것이 너무나 틀려 직접 눈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자주 접하지 않으면 친해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보다 쉽고 친밀하게 유도하기 위한 국악 프로그램 같은 것은 본 적도 없지만 하다 못해 비닐 위에 나무 장난감 배 몇 개 몰려놓고 거북선임을 주장하는 유치찬란한 영웅 이순신(이순신 장군도 그 영화를 보셨으며 심기가 불편했으리라) 같은 영화 단체 관람을 가기 보다는 운동장에서 국악인 몇 분 초청해 공연이라도 보여 주었으면 많은 사람의 인생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꼭 '우리의 것'이 국악과 접목하는 음악이라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방법 중의하나일 수는 충분히 있다. 지금 대중 음악의 실제 창작자들인 필자의 세대들은 철저히 그럴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자라났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에게 무국적이라느니 주체성이 없다느니 한다. 미국은 우리를 구해준 고마운 나라라고 가르치고 미군 트럭 뒤를 쫓아가며 '초콜릿 기브미'하던 이들이 노래 가사에 영어가 쓰인다고 펄쩍 뛴다. 그러나 '양키 고 홈'은 언 세대의 입에서 나왔던가. 일제 코끼리 밥통을 사러 몰려 다니던 이들이 우리에게 일본 풍의 옷을 입는다 한다. 그러나 당신들이 독립 기념관을 일제 건축자재로 짓는 것 만큼 아무 생각이 없지는 않다.
4. '우리의 것'이란 꼭 외양인 음악적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내면인 가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형식의 음악을 빌려 왔건, 그 내용이 지극히 한국적이라면 그 음악은 '우리의 것'일 수밖에 없다. '70년대의 청바지와 통기타 문화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서구적인 것의 유입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성 세대와 변별되는 고유 청년 문화의 출현과 젊은이들의 자의식 발현이라는 움직임 외에도 어쩌면 단조로울 수 있는 통기타 음악에 실린 그들만의 가사는 한국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특유의 느낌을 가진다. 그것은 한국 특유의 문화 정치적 상황과 우리말 특유의 어감, 표현이 만들어 낸 것이다. 김민기, 양희은, 하대수의 음악이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 과연 얼마나 그 느낌이 살아날 것인가. 그러한 요소는 음악적 한계와 시대의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사라져 간 포크의 마지막 희망이자 구원이었던 '동물원'에게까지 살아있었다. 동물원의 음악적 외양이나 완성도는 김광석이라는 걸출한 싱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별 볼일이 없었다. 그러나 아마추어적으로 들리는 풋풋한 사운드에 실린 그 '내용'은 따뜻한 감성 속에 실린 비수로서 음악적 완성도의 논의 자체를 불필요하게 했다. (오히려 그런 서툰 듯한 사운드는 가사를 진실되게 들리게 하는 요인이었다. ) '혜화동'에서 느끼는 한국적 이미지는 한복, 가야금 등의 단어가 주는 고전적인 느낌만이 한국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헐떡거리며 달려온 산업화의 과정을 지켜본 세대만이 느끼는 '번쩍거리는 전철'의 뉘앙스는 우리가 랩 뮤직 저변의 흑인 정신을 그릴 수 없듯, 외국인도 결코 한국의 '현실'을 노래할 수 없음을 말한다. 비록 동물원의 가사가 정태춘의 그것처럼 피를 토하는 듯한 냉엄하고 가열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러시아의 현실을 노래하는 것은 러시아인의 몫이듯, 한국을 이야기 하는 것은 한국인의 몫이다. 그리하여 음악적 형식이 랩이든 포크든 헤비 메탈이건 간에 그 내용에 의하여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제 '우리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오크 통의 법칙을 아실 것이다 세로로 긴 판자 쪽을 붙여 만든 술통 말이다. 어느 한 쪽이라도 짧으면 물이 그리로 샌다. 결국 다른 판자쪽이 아무리 길어도 물을 담을 수 있는 양은 가장 짧은 것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다. 문화라는 것도 여러 가지 요인이 이와 같이 맞물려 있어 어느 한 분야만 해결된다고 '우리의 것'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1. '우리의 것'을 생각하기 전에 무조건 '남의 것'으로 평가 절하하는 못된 버릇부터 고치자. 남의 것이 무언지를 알아야 우리의 것도 알 수 있다. 세계는 좁아졌고, 공통언어가 돼버린 팝 음악의 무대에서 세계 각국의 뮤지션들이 자국의 자존심을 걸고 문화 전쟁의 전사로 싸우며 동시에 외화도 획득한다. 외국 유명 밴드는 긴 머리로 TV에 나오는데 자국내 음악인들은 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왜 축구 선수에게 야구공을 차라고 우기는가. 이태리어로 노래하는 오페라 가수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면서 크래쉬가 영어로 노래를 한다고 뭐가 그렇게 고까운가. 좀 더 관대해 지고 시야를 넓히기 전에는 영원히 'Only 국내용'뮤지션만 존재할 것이다.
2. 표절에 대한 어떠한 문제 의식도 없이 책임회피에 전전긍긍하느니 시장 경쟁을 통한 자연 도태를 택하자. 옛날에 우리나라에 치약이 단 한 종류밖에 없던 시절, 외국 치약이 들어오자 상황은 급변했다. 더 이상 국민에게 '안 쓸려면 말라'는 소리를 못하게 된 것이다. 경쟁 없이는 발전도 없다. 힘겨운 싸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일본 음악이 들어 온다고 해서 우리도 앉아서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3. 어느날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지 말고 지금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국악 교육을 강화하라. 국악에 조예가 깊게 되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최소한 한국인이라면 국악에 대해 이방인이 되어버리는 비참한 상황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 필자의 짧은 소견이지만 현 시점에서 국악에 대한 위협은 재정이나 환경이 아니다. 필자는 아직까지 돈 벌려고 국악 했다는 사람은 못봤다.. 문제는 '저변인구'에 관한 위협이다.
4. 국내 대중 음악이 천편일률의 가사로 덮인 것은 인위적인 통제의 결과이다. 우리말이 서정적인 맛을 재기에는 유리하나 메시지를 담기에 불편하다는 것은 주 원인은 아니다. 해야 될 말을 고민할 시간에 이리저리 빙빙 돌려서 말해야 하는 것까지 연구해야 한다면 이 나라는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인가? 지금 당장 심의가 완전 철폐된다고 해도 노예적 근성에 길들여진 체질이 바뀌는 데에는 시일을 필요로 할 것이다. 서양 열강의 문물에 밀려 외형적으로는 서구사회의 그것을 그대로 채택하여 굳어지고 있는 시대, 그중에서도 이웃 국가의 식민지가 되었었고 외국 군대가 진주하며 국토가 분단된 나라에서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불리한 출발점에서 좌절하기보다는 예술이라는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꽃은 언제나 고통과 인내를 자양분으로 요구함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자.
글. 신해철 (N.EX.T의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