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 태어나면서
1989년도 기사
1968년 5월 6일 나는 중구 회현동의 한 병원에서 아버지 신현우씨(57)와 어머니 김화순(53)씨의 외아들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내 위로는 나보다 2살 위인 누나(신은주. 25-역시 당시)가 있다. 약대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 하시던 약국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셨다는 데 사업이 잘돼서인지 내가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자가용을 굴릴 정도로 비교적 부유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외아들인 내가 응석받이로 자랄까봐 그러셨는 지 10남매중 장남이셨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나를 의식적으로라도 장남처럼 엄하게 키웠던 것 같다. 놀다가 넘어져도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한번 일으켜 세워주신 적이 없을 정도였다..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 나는 아버지한테서 "너는 남자답게 으젓이 여자인 누나를 감싸주고 어려운 일에는 네가 나서야한다" 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누나에게는 "네가 누나니까 부모가 없을 때는 네가 엄마 노릇을 해야하고 무엇이든 동생에게 양보하라" 고 하셨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막내라는 느낌을 가져 본적이 없다..자라면서는 늘 오히려 누나의 오빠(?) 노릇을 할만큼 조숙했던 것 같다 국민학교 4학년때에는 6학년이었던 누나에게 반의 남자아이들이 짓궂게 한다기에 다짜고짜로 6학년 교실에 쳐들어가 '아무개자식 나와라 밟아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칠 정도로 기백(?)도 있었다. 내가 태어난 뒤 얼마안돼서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이 번창해 나는 꽤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집스러우리만치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아버지는 바같일 못지 않게 가정에도 충실해 우리 남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자상하셨다. 어머니 역시 우리들이 이세상 어디에도 우리 엄마보다 더 좋은 사람이 없다고 느낄만큼 나와 은주누나한테 애정을 쏟았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오신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한 뒤 줄곧 아버지 내조만 해오셨는 데 아버지를 얼마나 신뢰하시는지는 몰라도지금껏 아버지 의견에 반대하시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아무튼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단란한 가정이었던 것 같다..내가 나중에 음악을 한다고 설쳐대면서 집안을 좀 시끄럽게 하긴 했지만(사실 지금도 그렇다) 우리집은 이 땅에 흔치 않은 화목한 집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지금도 내가 아니 우리누나까지 포함해 이런 집안에 태어나게 된 것을 큰 복이라고 여기는 것도 이같은 연유에서다. 비교적 생활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인지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에게 일찍부터 예능교육을 시키셨다..누나와 나는 모두 4살때부터 피아노교습을 받았는데 천주교 신자로 평소 종교 음악에 큰 관심을 가지셨던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좋은 음악교육을 받게 하려고 꽤나 마음을 쓰셨던 것 같다..아마 마음 같아서는 누나나 나 둘중에서 불세출의 음악가가 한명쯤 나와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어너니의 바람은 나에게 음악교육을 받게 한지 얼마 안돼 산산히 무너졌을 것이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데 유치원시절 내게 피아노 레슨을 해주시던 선생님이 하루는 어머니를 오시라고 해 내가 영마음에 안들었는 지 "해철이를 피아니스트로 키우실 생각이신가요"라고 물었다..이에 몹시 당황한 어머니가 "아뇨,그저 취미삼아 피아노를 배워두게 하려는 건데요"라며 입을 다물었다..그랬더니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그럼 다행이군요"라고 말을 받았다. 어렸을 땐데도 나는 두사람의 대화에서 내가 음악에 소질이 없는 애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사실 나는 미술을 전공했던 삼촌과 이모들을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음악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가 더 좋았고 스스로도 오히려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느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을 들었는 데 6살 때인 73년에는 전국 아동 미술 실기 대회에 나가 우수상까지 받았었다..사립 국교인 미아리의 영훈 국민학교시절에도 교내 사생대회에서는 빠지지않고 상장을 차지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가 그래도 미술보다는 음악에 더 마음이 끌리셨던데 있다..물론 나도 악기를 다루거나 음악소리를 듣는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