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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악과 함께 무한히 비상하고 싶다' 


고2에 올라가면서 성적이 반에서 10등밖으로 밀려나는 때도 있었다. 집에는 내가 마치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문제아처럼 비치기 시작한게 당연했다. 


고2에 들어서는 마침내 아버지한테서 '성적이 너무 많이 떨어지는 것 같으니 공부에도 좀 신경을 쓰는게 좋겠다'는 수차의 경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럴때면 으레 '앞으로는 학업과 음악활동을 병행해 책임지고 좋은 성적을 유지하겠다'고 천역덕스럽게 아버지에게 말하곤 했지만 '어떤 음악을 해야할까'라는 생각만으로 머리속이 꽉 찼다. 늘 더 성적이 떨어졌다가는 된통 혼이 날거라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좀처럼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2학년 2학기 초쯤이었다. 하루는 연습실에서 신나게 기타를 두드리다가 채 흥분도 가시기 전에 집으로 가 대문을 들어서려는데 내 통기타가 대문밖 쓰레기통에 쳐박혀 있었다. 


가슴이 철렁하며 순간 정신이 퍼뜩 났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보나마나 성적이 자꾸 떨어지는데 참다 못한 아버지가 격한 기분으로 기타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신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이내 '공부에도 좀 신경을 쓸걸 그랬구나'하는 일말의 후회스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기타를 팽개치고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집안으로 갖고 들어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기타를 재반입(?)시키는건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반항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한 꾸지람을 들을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무섭기도 하고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도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동안 대문밖에 웅크린 채 기타를 껴안고 울음을 삼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내가 공부도 잘하겠다는 약속을 못지켰으니 당연히 그러실수는 있었다. 하지만 기타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신게 그때는 정말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당시엔 뉘우치기보다는 '그래도 난 음악을 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스스로에게 더 다졌던 것 같다. 물론 입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뭐든지 하지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처럼 나도 그 일을 겪고 난뒤 왠지 음악에 더 애착이 갔다. 하루라도 연습실에 못들려 기타를 만지지 못하면 다음날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 일이 있은 뒤 내가 자성하는 기미를 보이기는 커녕 부모눈을 피해 음악에 더 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신 아버지는 나를 버린 자식 취급까지는 안해도 무척이나 못마땅해 하셨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불만스러움은 대학입학을 앞두고 더욱 고조됐다. 


"해철아 너 대학 어디를 갈 작정이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철학과를 지망하려고 하는데요"라며 다소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철학과"라고 반문하시는 아버지의 안색이 변하는 걸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철학과를 지망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거냐?" "아뇨 그냥 철학공부도 좀 하고 싶고해서..." 


이렇게 말하는 내 말투에는 음악을 반대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리가 짙게 베어 있다고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대학?" "서울대를 가고 싶지만 좀 힘들것 같고 해서 서강대로 정했는데요" 아버지는 기가 막히다는듯 더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때 옆에 계신 어머니는 이미 나때문에 충격을 받고 난 뒤였기 때문인지 잠자코 계셨다. 


어머니의 충격사건(?)은 대입 학력고사를 두달쯤 앞둔 고3말경에 일어났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내 진학문제 상담차 학교로 어머니를 오시라고 하고선 얘기 첫마디에 "해철이 이래가지곤 전국에 있는 4년제 어느 대학에도 못가겠습니다"고 선포(?)를 하셨다. 


물론 그 말은 내가 너무 공부를 안한다는 것을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것이었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어머니로서는 그야말로 맑은 하늘에 날벼락을 맞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 무렵에는 성적이 너무 떨어져 모의고사 성적을 집에는 알리지도 않았다. 


남들이 진학을 앞두고 눈에 불을 켜고 책과 씨름을 하고 있을때 나는 갈수록 더 음악에 정신을 쏟았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똥배장으로 그처럼 공부에 태연할(?) 수 있었던지 모르겠다. 


하여튼 어머니는 당시 별의별 생각을 다하셨다고 한다. 어렸을때부터 좀 유별나게 놀아 대견스럽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론 혹시 잘못자라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을 해왔는데 정말 그같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는 것이다. 


어떤때는 축구에 미쳐 한달여간 발이 부르트도록 축구공만을 차는가하면 그런 뒤에도 또 어느날 갑자기 과학자가 돼 설거지를 해주는 로봇을 만들겠다며 하루종일 장난감로봇의 조립만 골몰하는등 이것도 되겠다 저것도 되겠다며 갈피를 못잡게 극성 맞았던 생각이 나더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실은 중학교때부터 음악을 한다기에 다른 때처럼 그러다 말겠지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될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국민학교 4학년때 성당에서 '아우구스틴'이란 세례명을 받게 된 것도 어머니의 추천에 의해서였는데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던 어머니는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성인 '아우구스틴'을 떠올렸다고 한다. 아우구스틴은 탕아에서 그 어머니 모니카의 정성스런 기도끝에 마침내 성서학자로 거듭난 성인이라고 한다. 결국 어머나는 일찌감치 예견하셨던 모양이다. 


아무튼 학교에 다녀오신 뒤 너무나 암담하셨던지 어머니는 '아예 재수를 할 결심을 하라'며 다그치셨지만 그때마다 나는 '음악을 계속해야하니까 결코 재수는 할 수 없다'며 버티셨다. 


무난히 서울에서 가장 번듯한(?) 대학을 보란듯이 들어갈 거라고 굴뚝같이 믿었던 부모님들은 아마도 이게 현실이 아니길 바랐을지 모른다. 밣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서울대 의대를 지망했다가 고배를 들고 결국 성균관대를 나온 아버지는 서울대에 대한 미련으로 자식만큼은 꼭 서울대에 입학해 주길 기대해 오셨던 것 같다. 


어려서는 뭔가 될듯 싶었던 내가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며 여지없이 기대를 깨버리는데는 실망을 금치 못하셨을 것이다. 또 반드시 대학에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을 보인것 만으로도 크게 다행스러워 하셨던 어머니는 "철학과를 나오면 나중에 직장잡기가 어려워 자칫 고등룸펜이 될수 있다"며 지망하는 과만을 바꾸도록 설득해 보랴고 하셨지만 이것 역시 허사였다. 


이전에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프리드리히 뎃시일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등 종교철학서적들을 탐독하고 이에 심취하기도 했던 나는 한때나마 음악을 하지 않는다면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에겐 이미 어느 대학 어느과를 가다는 게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공부를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대학에 간다기보다는 대학물은 반드시 먹어봐야 한다는 어줍잖은 생각과 대학생이란 간판아래 음악활동을 하는게 그래도 낫지 않겠느냐는 다분히 계산적인 생각에서 대학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대학엔 가야했겠지만. 


결국 이런 진통끝에 대학입시를 한달쯤 앞두고 책을 붙들어 힘겹게 서강대 철학과에 적을 두게 됐다. 부모님들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시면서도 못내 마땅해 하시는 건 여전하신것 같았다. 


아무튼 대학입학이 결정된 87년 초부터는 제세상을 만난듯 하루종일 길음동 각시탈연습실에 파뭍혀 발악을 하듯 발성연습을 하거나 기타와 씨름을 하며 지냈다. 집에서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치는 때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리더로 있던 각시탈은 87년 봄부터 멤버들간의 음악에 대한 견해차가 심하게 벌어지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삐걱거리다 87년 여름 급기에는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해철이가 너무 독주를 하는 것 아니냐"하는 동료들의 불만도 팀의 해체를 앞당기게 한 요인이 된게 사실이다. 너무 열심히 하려다보니까 그런 결과를 빚게 된 것 같다. 


사실 대학에 들어오면서 나는 정말 나만큼 음악에 미쳐있는 사람있으면 나와보라고 할만큼 음악에 빠져있었다. 


3년 이상을 몸담았던 각시탈해체가 아쉽기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진통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팀해체 이후 한동안은 정말 나혼자 버려져있는 듯한 느낌과 내가 너무 모르고 덤벼드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팀해체의 아픔을 잊으려는듯 닥치는대로 이름없는 그룹들을 전전했던 나는 밤을 새워가며 음악을 하는 친구들과 토론을 벌이는등 음악에 대한 열정을 더욱 뜨겁게 달궜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그룹을 조직해 활동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게 대학신입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1월 말경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녀석들과 그룹을 만들면 음악다운 음악을 할수도 있을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그동안 음악활동을 해오며 만났던 내 또래의 음악동지(?)들 가운데 기억에 남았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한번 모이자고 했다. 그렇게해서 겨울방학 직후에 신촌의 이대앞 카페에서 나를 포함해 모두 5명이 모였다. 나와 김재홍, 조현문, 양두현, 조현천등이 그 몇몇인데 이들은 이미 서로를 잘 아는 친구사이였다. 


이렇게 모인 5명이 바로 내 음악활동의 기반을 닦게 했던 그룹 무한궤도의 창단멤버들이다. 


그룹 조직의 의사타진을 할 요량으로 함께 모인데서 내가 "다들 음악을 좋아하니 한번 우리끼리 그룹을 만들어보자"고 하자 친구들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 즉석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너나할것 없이 내가 모이자고 했을때 이런 제안을 예상했던 만큼 말 안해도 결론(?)을 알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일단 내친 김에 그룹 이름까지 정하자고해 제안된 여러 이름 가운데 '음악과 함께 무한히 비상하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된 무한궤도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리드보컬은 내가 맡고 키보드는 김재홍(서울대 치대 분과 2학년)과 조현문(서울대 인류학과 4학년), 베이스는 양두현(서강대 철학과 중퇴, 미유학중), 드럼은 조현천(연세대 토목공학과 4년)으로 파트조정까지 끝냈었다. 


그리고는 얼마 안있어 보광동의 현천이네 집 지하실방에서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음악을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나선 마당에 나에게 닥친 가장 큰 어려움은 쓸만한 악기를 구입하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왠지 집안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능하면 학비고 용돈이고를 집에 덜 의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던 나로서는 차마 다른 것도 아닌 악기를 살 돈을 내놓으라고 집에다 손을 벌릴수가 없었다. 


결국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 1학년초부터 과외 지도를 비롯해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닥치는대로(아마 30가지가 넘을 것이다) 했던 나는 값비싼 악기들을 구입하자니 정말 더욱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야 했다. 


한밤중에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며 연극등 각종 공연포스터를 붙이는 중노동에 뛰어들었던 것도 돈을 모아 악기를 사야겠다는 일념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포스터를 함부로 붙이는게 불법이라서 밤 1시경부터 새벽녘까지 주로 밤일(?)을 했는데 한겨울에 이런 일을 하면서 이런게 고생이구나 하고 느낄 정도로 심하게 고생을 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룹 결성 당시 무한궤도 멤버 가운데 필요한 악기나 음악기자재를 집의 도움없이 자신이 직접 마련한 경우는 나밖에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나와는 달리 대체로 집안의 긍정적인 시선(?)아래 그룹활동을 시작한 것 같았다. 즉 '젊은이들로서는 이런 음악활동에도 뛰어들어 볼만하다'는 집안의 이해가 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지하실방을 우리 연습실로 사용하도록 선뜻 허락하셨던 현천이 부모님들은 반대는 고사하고 가끔 연습하는데 들러 우리의 난해한 음악을 감상(?)하시곤 하기까지 했었다. 이때에는 그처럼 음악을 이해해주는 부모님을 둔 현천이가 내심 얼마나 부러웠던지. 


무한궤도에서 나 이외에는 모두 '음악도 좋지만 그래도 학업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정해진 연습시간을 마치면 '말같이'도서관으로 직행할 정도로 학업에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연습시간이 성에 차지 않아 미진한 느낌을 지울수 없었고 그럴때면 홀로 연습실에 남아서 기타를 두드리곤 했다. 


한편 각시탈에 이어 무한궤도에서도 팀의 리더로 나설 수 있었던건 이같은 열정이외에도 음악적으로 개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팀을 결성할 당시 멤버들은 대체로 각자의 음악적 성향이 뚜렷했다. 


키보드를 쳤던 조현문이가 프로그래시브 음악에 열공했는가 하면 역시 키보드의 김재홍은 댄스뮤직에 그리고 드럼의 조현천은 록음악에 심취하는 등 각자의 취향에 맞는 장르가 아니면 다소 거부감까지 보일 정도였다. 반면에 나는 특별하게 집착하는 음악장르가 없이 의욕만 앞서서 그야말로 두리뭉실하게 모든 장르의 음악을 다 접하려 했기에 어쩌면 오히려 그룹음악의 독특한 색깔을 내는데도 내가 제격이었는지 모른다. 


음악적으로 무한궤도는 프로그래시브한 성향이 강한 록음악의 사운드를 내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해보고 싶은 연주는 다 시도했었다. 물론 대중음악의 귀로는 도저히 들어줄 수없는 사이키델릭한 전위적인 음악을 연주하면서 음악성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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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crom's di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