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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Oct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3: 그룹활동의 시작 <각시탈>작성자: anonymous 조회 수: 3992
[3] 그룹활동의 시작 <각시탈>
집에서는 내가 음악에 빠져 해드폰을 끼고 살다시피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겠지만 성적이 좋은데야 뭐라고 말씀하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중학교때까지만 해도 학교공부도 충실히 하면서 음악도 좋아하는 꽤나 괜찮은(?) 학생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았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상황은 일변했다. 아니 상황이 변했다기보다는 어쩌면 내가 상황을 변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것 같다.
중학교때까지만해도 음악을 듣는데 만족했던 내가 고교입학직후부터는 직접 음악을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계기는 1학년초에 같은 반이었던 이재용이란 친구를 사귀면서 비롯됐다. 이재용은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얼굴이 잘 생겨서 반에서 주목을 받던 친구였는데 그를 사귄 직후 알게된 사실은 그가 교외에서 그룹활동을 하며 베이스주자로 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냐 네가 그룹을 할 정도로 베이스기타를 잘 쳐?"
그룹음악에 누구못지않게 관심이 깊었던 나로서는 정말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의 관심을 끌 심산으로 "나도 기타를 좀 치고 노래도 할 줄 안다"며 좀 허세를 부리고 재용이에게 접근(?)했다. 사실 당시 내 기타실력이라야 통기타 들고 겨우 코드나 짚을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고 노래 역시 더 말할 것도 없다는 건 이미 얘기한 대로다.
내심 좀 부끄러웠지만 베이스주자란 말만으로 시쳇말로 '뻑이 간'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내가 무척이나 그룹활동에 관심을 보인다 싶었던지 재용이는 나더러 "우리 그룹의 연습실이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실제로 그룹들이 어떻게 모여 음악을 연주하는지에 호기심이 많았던 내가 싫다고할리 만무했다. 그렇게해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가본 데가 길음동에 있던 아주 낡고 허름한 2층 목조건물 구석방이었다.
처음 연습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가 생각한게 이런게 아닌데...'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정말 실망을 했다. 원색의 '요란뻑적지근한'차림새로 으리으리한 악기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적어도 당시 내가 그리고 있던 그룹의 상이었다. 물론 이것은 무수한 팝송잡지에 실린 외국 헤비메탈이나 록그룹의 사진들을 많이 본 탓이겠지만.
아무튼 상상과는 동떨어진 이 연습실에는 기타, 드럼, 키보드 등이 가까스로 구색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데려갔던 재용이는 내가 실망해하는 빛을 보았는지 "왜 마음에 안드니, 다 그런거야"라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연습실을 둘러보며 뭔가 꿈이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사이 또 두녀석이 들이닥쳤는데 얼굴을 보니까 기가 막히게도 둘다 영훈국민학교 내 동창생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음악을 하는 동창생들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이들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내가 지금 이렇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게 됐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들의 모임이 각시탈이라는 그룹이었는데 각시탈은 원래 경복고등학교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음악서클 명칭이었다. 당시 키보드를 쳤던 김재홍(나중에 대학때 '무한궤도'로 활동)등 동창 2명이 경복고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룹이름을 그냥 각시탈이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그둘은 나를 보자 "각시탈에 들어오고 싶은 생각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면 누구나 오디션(?)을 받아야 한다"며 나에게 기타를 메고 노래를 한곡조 뽑아보라고 했다. 오디션 결과는 물론 엉망(?)이었지만 가입을 이미 결정해 놓은 상태에서 형식적인 승인절차(?)에 불과했던만큼 나는 그날로 각시탈멤버가 될 수 있었다.
비록 보잘것 없는 그룹이었지만 그래도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하고 싶은 음악을 할수 있게 됐다는게 여간 뿌듯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이제는 내가 그토록 동경해온 록그룹연주의 흉내를 낼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한 셈이었다.
이 각시탈이 머리털나고 처음 속한 그룹으로 이때부터 나의 그룹활동이 시작됐다. 당시 우리들은 음악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같이 헤비메탈이 아니면 음악이 아니라고 할만큼 헤비메탈을 좋아했다. 그래서 늘 헤비메탈에 매달렸는데 턱없이 부족한 연주실력으로 헤비메탈사운드를 내자니 정말 그것은 연주가 아니라 일종의 소음생산이었다. 나보다 좀 먼저 그룹에 속해 있었던 친구들이 연주실력도 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건 당연했다.
방과후 길음동 연습실에서 외국의 헤비메탈이나 록그룹의 음악을 본떠 연습에 열중하다가 아래층에서 소음에 참다못해 뛰쳐올라온 사람들한테서 협박(?)을 당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너희들 더 이상 시끄럽게 하면 악기고 뭐고 모조리 부숴버리고 쫓아내겠다."
방음장치가 전혀 안돼 있는 그런 곳에서 그처럼 막무가내로 악기를 두드려낼 배짱이 어디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정말 우리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꽤나 괴롭힘을 당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중학교때 그룹 라이브무대에서 한두번 어깨넘어서 보았던 일렉트릭기타를 처음 만져본 것도 각시탈에 들어가서였다. 통기타만 쳐본 나에게 전자기타의 강렬한 사운드가 짜릿짜릿하게 가슴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무척이나 서툰 솜씨였지만 기타코드를 튕길때마다 앰프를 통해 전달되는 전자기타음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이때부터 학교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습실로 달려가 전자기타를 안고 지내다시피 했음은 물론이다.
'어떻게 하면 전자기타를 보다 멋지게, 그리고 자유자재로 칠수 있을까' 내 머리속은 온통 이 생각만으로 꽉찼다. 그러다보니 걸핏하면 무대에서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열정적으로 기타를 치는 굼을 꾸곤 했다.
이런 뜨거운 열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각시탈에 들어가서 한동안은 내 기타도 없이 지냈다. 차마 기타를 사달라는 얘기가 나오지않아 악착같이 용돈을 모아 중고 전자기타를 구입한게 각시탈에 들어간지 4개월쯤 지난후인 1학년 여름방학때였다.
기타를 마련하고 나서는 얼마나 기타를 끼고 살았던지 그룹친구들은 나보고 "아예 기타케이스속에 기타와 함께 들어가라"고 놀려댔다.
각시탈 친구들의 연주솜씨는 나와 별 차이가 없었기때문에 나름대로 기타연주방법을 터득해갈 도리밖에 없었다. 외국의 유명한 기타리스트들의 기타교본을 구해다가 연습을 하거나 록밴드의 연주를 반복해서 듣고 기타음을 그대로 본떠 근접한 소리가 나올때까지 기타줄을 두드리는게 최선의 연습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1학년때에는 내 욕심만큼 많은 연습시간도 가질수 없었다. 중학교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1학년내내 학급반장을 맡은 내가 그룹활동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을 눈치채신 담임선생님은 툭하면 방과후 학습일지 정리를 맡기시는 등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나를 붙잡아 놓기 일쑤였다.
애가 탄 나는 선생님이 시키신 일을 하지않고 연습실로 뺑소니쳤다가 꾸지람도 여러번 들었다.
아무튼 나는 각시탈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다른 친구들이 무슨 그룹을 하고 있다는 소리만 들으면 한수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닥치는대로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찾아간 그룹이 마음에 든다 싶으면 때론 거기서 불청객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며칠간씩 들락날락거렸다.
이렇게 열심히 한탓인지 2학년때부터 자연스럽게 팀의 리더가 될수 있었다. 기타연주실력은 별반 신통치 않았지만 비교적 음악을 폭넓게 많이 알고 악보등 뭐가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구해오고마는 성의가 있다는 점을 친구들이 인정했던 것 같다.
당시 각시탈은 프로그래시브한 냄새가 많이 나는 록밴드의 음악을 좋아했는데 특히 나는 유라이어 힘이나 에버스 레이건 파마의 음악처럼 록에 클래식적인 요소를 가미한 그룹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각시탈에서 그룹음악을 시작할 무렵인 고교1초에는 교내방송반에도 가입해 방송요원으로 교내방송일에도 꽤나 전념했었다.
고2 1학기말에는 학교방송반대표로 방송요원2명과 함께 전국고교생방송 콘테스트에 나가 내가 극본을 쓴 방송드라마<행복을 찾아서>로 우수작품상과 각본상, 연기상등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노래라면 주눅이 드어서 기를 못폈던 내가 각시탈에서 물을 만난 고기처럼 남이야 뭐라든 목청을 높여 내식대로(?) 노래를 하며 펄펄 날았던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전혀 인연이 없어보였던 방송반에 들어가 활동한 전력도 이에 못지않게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누가 봐도 재능이 전무한(?) 쪽에 막무가내식으로 덤벼들어 해보겠다고 설쳐댔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처럼 음악과 방송에 관심을 가질수밖에 없었던 구석도 나에게 없지 않았던 듯 싶다. 우선은 잘 안되는 일을 기어코 해내고야 말겠다는 누구 못지 않았던 오기가 있었던데다 내 가슴속에 무언가 밖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과시욕(?)이 알게 모르게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학교 때부터 수없이 음악방송을 들어오면서 음악뿐아니라 방송의 매력에 일찍 눈을 떴던데도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지난 11월 중순부터 DJ를 맡아 MBC FM <밤의 디스크쇼>를 진행하는게 전혀 낯설지가 않은것도 다 고교시절 조금은 방송물(?)을 먹어봤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처럼 뭔가 돼가는가 싶은 음악과 방송활동에 정신을 팔다보니 공부는 자연히 뒷전일수 밖에 없었고 이에따라 성적이 점점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고교에 진학할 무렵부터 집안 살림이 피기 시작한 것도 내가 공부를 등한시한 배경(?)중의 하나가 됐다.
한동안 사업을 다시 일으켜 보랴고 안간힘을 쏟으셨던 아버지가 마침내 체념(?)을 하셨던지 근 15년만에 약국을 다시 열었는데 그이후 살림이 급속히(?) 펴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생활이 나아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버지는 왜 진작 약국을 하지 않으셨을까'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정도였다.
집이 좀 살만해(?)지다가 내가 중학교시절 집안이 어려웠을때 부모 속을 썩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부만은 잘해야겠다고 한 결심이 명분을 잃고(?) 언제 그랬냐싶듯 사라져 버렸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공부도 점점 어려워지게 마련인데 이처럼 공부에 대한 마음가짐이 느슨해져 있으니 성적이 오를리 없었다. 중학교때까지만해도 IQ를 앞세워 그런대로 버텼지만 고등학교부터는 그런게 통하지 않는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