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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Oct
음악에세이 대중음악 공연의 현주소는 Part I작성자: anonymous 조회 수: 2332
일곱 번째 이야기-대중음악 공연의 현주소는 Part I
수 많은 공연 치르며 느껴진 엄청난 격세지감
대중음악의 공연문화의 공연장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이번 호에는 필자의 직접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분석해 보기로 하고, 천년만년(?) 변하지 않는 우리나라 공연 문화의 열악함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깊이 논하기로 한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무렵, 동네 극장에 조용필 리사이틀이라는 포스터가 붙었드랬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아마 `창밖의 여자'가 나오고 조용필의 시대가 열리기 바로 전이었던 것 같다. 그 후였다면 우리 동네같은 변두리에 위대한 조용필이 올 리가 없잖은가. 하여간 전기 기타를 메고 머리를 휘날리는 사진이 멋있어서 구경가세 해 달라고 부모님께 졸랐다가 욕만 무지하게 먹었다. 우리 아바마마 왈, "저 녀석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지?"(뭐가 되긴... 가수 됐지) 필자가 고등학생이었을 무렵, 동숭동에서 완존히 무명 어떤 들국화가 콘서트를 했다. 너무나 좁은 공간이라 무대 위에 드럼을 놓을 자리도 없어 그냥 기타, 베이스, 키보드만으로 공연을 해야 하는 열악한 무대였지만 내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밤이었다. 훗날 그들의 출세곡이 된 `그것만이 내 세상'과 `행진'을 들었고 'He ain't heavy he' my brother'에서는 전인권의 살인적인 목소리에 전율하다가 `Come sail away'에서는 같이 간 친구놈과 결국 눈물을 주루룩...했던 것이다. 결국 대기실로 잽싸게 들어가 싸인까지 받아 왔는데(속으로 으앗 가까이서 보니 무지하게 무섭게 생겼다라고 쭝얼대며)불과 얼마 후 들국화가 그렇게 엄청나게 유명해질 줄 모르고 그날 같이 간 친구가 딥 퍼플 일본 공연실황 원판과 바꾸자길래 망설이다가 그만 바꿔버렸다. 유명해질 줄 알았더라면 안 바꿨을 거냐고? 그럴 줄 알았더라면 딥 퍼플 전집을 받아낼 걸 그랬다는 얘기다. 그 친구는 부잣집 아들이어서 딥 퍼플을 몽땅 원판으로 갖고 있었고 나는 들국화도 물론 좋아하게 됐지만 딥 퍼플 전집은 그 이름만 들어도 경련을 일으키는 광이었기 때문에?
포스터 직접 붙이던 데뷔시절
필자가 대학생이 됐을 때, 난생 처음 단독공연을 하게 됐다.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악기 운반까지 손수 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룹 멤버들이 판매할 표를 분담하여 안면 있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협박, 사정, 호소, 유혹(?), 회유 등 등을하여 무려 500명 정도의 관객을 동원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무거운 엠프를 운반하다가 그만 허리가 삐끗했던지라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갸우뚱한 포즈로 연주를 해야 했다. 상당히 개성있어 보였다는 위로성의 멘트가 있었지만 사실 남의 속도 모르는 소리다. 게다가 포스터 붙일 때 손에 묻었던 풀(사실은 풀과 본드가 5:5) 때문에 손의 피부가 갈라져 기타를 칠 때마다 손에서 피가 나왔다. 하여간 악전고투하는 상황이었는데, 관객석의 맨뒤쪽에 서 있는 누군가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부모님이 우리 팀의 콘서트에 나타나신 것이다. 훗날 들은 얘긴데 어머니께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확인이나 해보고 반대를 하더라도 할 일이다 라고 장시간 아버지를 설득,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벌어진 것이다.자, 그리하여 콘서트에서 아들의 모습을 보고 감동한 아버지가 드디어 음악을 할 것을 허락하...면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현실은 영화가 아니기에 (으휴-한숨) 우리 아바마마께서는 무대 위에서 괴성이나 꽥꽥 질러대는나의 모습을 보시곤 아들의 장래를 위해 더욱 철저하게 저 바보짓을 말려야겠다고 결심하셨고, 그후 나의 생활은 무지하게 피곤했다.필자가 솔로 가수로 나서고 첫 콘서트를 하게 되었다. 콘서트를 위한 음악의 편곡과 연출은 물론, 무대 연출, 기획, 진행까지 손수 해야 했다. 당시에는 공연에 컴퓨터를 동원하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았었는데, 사람의 연주와 컴퓨터의 비중을 1:1로 가정하고 있던 나는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풋내기 신인 가수가 뭘 알겠느냐는 식의 의식 때문에 도무지 말이 먹히질 안항ㅆ다. 밤새 현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 후, 막상 무대에 올라갈 시간이 되자 이미 목은 쉬어버린 상태였고, 무대 위에
서 마이크에 에코를 많이 쓰는 타입의 나에게 음악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며 전혀 에코를 걸어 주지 않아서 안 그래도 가뜩이나 잘 하는 노래가 엉망이 돼버렸다. 오기가 스멀스멀 올라와서 나머지 공연을 완전히 악으로 했다. 관객 동원이나 무대 매너 등은 결국 후한 평을 받은 공연이었지만, 그 음향팀과는 이날 이 때까지 절대로 같이 일하지 않는다. 전문 공연 기획자나 연출자가 전무한 상황, 자신들이 음향을 맡은 가수의 노래를 한 번도 듣지 않은 엔지니어, 기타 솔로 때에는 베이스, 키보드 솔로 때는 싱어를 비추는 조명, ... 정말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외로움을 느꼈다. 재즈 카페가 나온 후, 첫 전국 투어를 하게 됐다. 기타가 정기송 (전 넥스트), 드럼이 이동규(전 넥스트), 베이스가 김영석(현 넥스트)이라는 라인 업이었는데, 그 외에도 몇 명의 세션맨과 코러스 걸들이 있었다. 베이스인 김영석은 일부 못 외운 부분의 악보를 바닥에 붙여 놓았는데, 막상 그 곡의 순서가 되자 무대 위로 포그(안개처럼 바닥에 깔리는 특수 효과)가 짜안 하고 흘러 나오더라는 것이다. 악보를 보기 위해 연주에 열중하는 척 허리를 굽히고 후후 불면서 연주를 했는데 1절 끝날 무렵엔 숨이 차서 하늘이 노랗더란다. 대기실에서 창백한 얼굴로 헥헥 숨을 몰아 쉬는 걸 나는 매우 고소한 표정으로 약을 올렸다. 거기까지는 즐거운 추억이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공연 중간 게스트 순서에 나의 베스트 프렌드인 윤상이 등장했다. 그런데 당시에 나는 내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디스크 쇼 를 그만 두었고, 그 후임자가 윤상이었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던 듯, 일부 관객이 윤상에게 야유를 한 것이다. 오히려 내가 야유를 받는 입장이었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이다. 나의 관객이 나의 친우에게 야지를 놓다니. 대기실에서 나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으로 나의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커다란 변화들
얼마전, 넥스트는 부산에서 콘서트를 마쳤다. 예정에 따라 세트가 지어지고 서울과 부산의 스태프들이 모든 상황을 점검하는 동안 우리 밴드는 호텔에서 숙면을 취했다. 몇 개월의 회의 동안 나는 모든 요구사항을 세밀히 전달했기 때문에 리허설엔 나가지도 않았다. 무대 위의 악기 세팅은 밴드가 연주를 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전문 로디 팀이 멤버 개개인의 요구에 따라 완전히 갖춰 놓았다. 모든 엔지니어들과 조명 오퍼레이터들은 콘서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히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공연에서 문제로 지적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체크, 무대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도 별로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관객은 질서있게 입장했고 안전요원들의 관객에 대한 반말이나 욕설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다. 예상을 상회한 관객 숫자 때문에 입장에 시간이 걸려 시작 시간이 약간 지연된 것뿐. 문제는 경찰이었는데, 안전에 대한 우려는 고맙지만 경찰이 관객 앞에 줄을 서 있는 상태에서는 무대에 올라가는 것은 우리 밴드와 관객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게 우리 입장이었다. 심지어 "경찰도 입장료 내고 관객석에 앉든지 아니면 나가라"는 말까지 나왔다. 어쨌든 경찰 아찌들의 양보로 공연은 시작되었다.(그쪽에서 보면 양보지만 사실은 우리의 권리일 뿐이다. 밴드, 기획자, 관객 그 누구도 경찰을 요청한 적이 없었으니까) 공연 내내 관객들은 정말 우리 밴드를 감동시켰다. 우리가 질서를 지킨 것을 못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매번 연주가 시작되면 모조리 일어나서 춤추건 소리지르건 뛰건 맘대로 하고 연주가 끝나면 제자리에 앉아달라고 했다. 우리가 연주를 시작하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물론 제자리에서만. 연주가 한 곡 짠! 하고 끝남과 동시에 관객석에 불이 들어오자 관객 전원이, 제자리에, 마치 수업시간에 앞자리에 앉은 친구 뒤통수 때리고는 룰룰 하면서 딴청 피우는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번개같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라이브 앨범을 믹싱한 엔지니어 최기선씨가 "넥스트보다 관객이 연주를 더 잘한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 함성이 나오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냐"라고 했는데, 사실 안무(?)는 더 잘한다. `도시인'에서 관객 전원이 양손을 들고 좌우로 빠르게 움직여 대자 베이시스트 김영석은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아서 하마터면 어느 부분을 연주하고 있는지 잊어버릴 뻔했다는 것이고 기타리스트 김세황은 눈이 나빠 관객을 구경하기 위해 무대 앞쪽으로 뛰어갔으며 드러머 이수용은 앞만 보고 치다가 박자가 흔들렸다는 것이다.게다가 팬클럽 여러분들은 공연이 끝난 후 체육관에 단 하나의 쓰레기 조각도 남지 않도록 해 주었다. 쓰고보니 필자가 너무 자화자찬한 것같아 좀 겸연쩍지만, 필자는 그 공연에서 정말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느끼며 뿌듯했고, 원로가수(?)소리를 들을 때까지 음악을 해옴으로써 이런 변화를 보게 된 것이 기뻤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고 넥스트의 공연이 절대로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나마라도 몇 년 전에는 꿈도 꿀 수 없던 변화들이었다.
뉴키즈 사태의 책임 뒤집어 쓴 치욕에서 벗어나야 할 때
그 첫째가 아까 말한 공연 기획, 연출, 진행 등 스태프들의 분업 및 전문화가 시작되어 목이 쉬기 전에 그리고 잠을 잔 상태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돈'문제뿐이다. 어차피 자본주의 시장이다. 이것은 필자의 인생관에서 돈이 얼마만큼 중요한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냥 끌린다는 이유만으로 공연사업 분야에 인재들이 모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콘서트의 시장 규모가 커져야만 좀더 규모있고 충시란 공연이 이루어질 것이고 능력만 있으면 춥고 배고프지 않게 이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판단이 서야만 인재들이 뛰어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적극적인 참여와 국가의 문화적 측면 외에도 산업으로서의 대중문화를 인식하는 정부의 먼 안목이 필요하다. 물론 대공연의 육성과 함게 공연 문화의 뿌리를 깊게 할 중소 공연의 중요성도 빼놓을 수 없다. 변화의 두 번째는 관객이다. 필자는 우매한 소견이나마 한민족의 기본 정서가 한이라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강제로 이식된 패배주의적 망국적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당당한 유산을 굳이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과연 우리 민족만큼 노래와 춤을 즐기며 신나게 노는 민족이 몇이나 되는지, 우리의 기본 정서는 오히려 `신명'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대중은 이 `신명'을 서양식의 공연에서 세련되게 발휘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뿐이다. 한국 관객이 기본적으로 수줍다라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신이 나면 관객이 순식간에 공연자 사이로 끼어들어 누가 공연자인지 관객인지 헛갈려지는 게 우리 전통 공연의 중요 요소이다. 서양에서는 관객이 공연자와 어울려 즉흥적으로 스토리가 변하는 건 `전위'라고 규정했으니 이런 쪽으로는 우리네가 한참 선배다. 이제 주눅든 표정에서 벗어난 우리 대중은 뉴키즈 사태의 책임을 뒤집어 쓴 치욕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발 한 발씩 관객과 공연자가 같이 세련되어가야 한다. 공연자는 관객의 수준이 곧 자신들
의 수준임을 인식하고, 관객은 자신들의 아티스트를 상징하는 얼굴임을 깨달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재미있자고 하는 게 공연이다. `재미'를 좀더 넓게 말하면 기쁨뿐 아니라 슬픔을 포함하는 카타르시스 전체이다. 현재와 같은 공연 문화에서는 공연자도 관객도 마음껏 이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필자는 앞에서의 두 가지 변화에 대해 그나마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결국은 시간 문제일 뿐이며 필자의 후배님들은 점점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 번째 변화에 오면 얘기가 절망적이 된다. 필자의 피부에 느껴지는 인식뿐만 아니라 들리는 얘기로도 도대체 `관'쪽은 천년만년 가봐야 변하지 않을 목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국민이 정부를 위해 있는 것인지, 문화진흥이라는 명목의 우리 세금은 어디로 가는지 매우 궁금하다. 왜 이런 궁금증이 드는지 다음호에서 이야기 하겠다. 그 후에 누군가가 `모든 일이 잘 돌아가는데 너는 머리가 나빠 잘 이해가 안 가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면 좋겠다.
추신 : 얼마전에 딥 퍼플의 콘서트를 보고 왔습니다. 방 벽에 그들의 브로마이드를 붙여 놓고 콘서트를 가디린지 15년만에, 이제야 할아버지가 되어서 그들은 왔습니다. 물론 기다린 보람은 있었죠. 존경하는 존 로드의 백발을 보며 내내 헤드뱅잉을 하고 왔거던요. 옆자리의 꼬마가 매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저를 보더군요. 그런데 짧은 영어실력이 캥겨서 대기실로 가 싸인받을 엄두를 못 냈어요. 사실은 직접 보면 긴장해서 헬로...도 못 할 거 같아서요. 혹시 싸인 받으신 분 계시면 한 장만 복사해서(감히 진품 달라는 소리는 못 하고요) 지구촌(GMV)으로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추신2:저도 15년 뒤에 지금껏 당신들 콘서트를 기다렸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해요.
글. 신해철(그룹 N.EX.T의 리더)
일러스트.이현식